항목 ID | GC04212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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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工藝 |
영어의미역 | Handicraf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현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실용적인 물건에 본래의 기능을 살리면서 조형미를 조화시키는 공예 문화.
[개설]
공예라는 정의를 내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개념의 공예와 서구에서 들어온 근대적인 개념의 공예와의 차이로 인해 한국의 공예를 정의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실제 일제 강점기에 시작된 조선 미술 전람회에 한국의 전통미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공예부가 신설되었고, 오늘날의 공예라는 의미의 모체가 되었다. 초기에는 도안(圖案) 또는 의장(意匠)이란 뜻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추가되면서 공예의 영역과 의미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공예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도구이자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매개체이며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부산의 공예는 1960년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970년대부터 현대적인 개념의 공예가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부산의 공예에 영향을 미친 작가와 단체와 모임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모색기: 1950~1960년대]
부산 공예 활동의 태동은 1960년을 기점으로 보고 있으나 해방을 맞이하여 정치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과도기적 혼란을 거듭하였지만 1948년 민중 일보사 주최 제1회 부산 미술 전람회가 동광국민[초등]학교에서 동양화, 서양화를 중심으로 개최되어 이를 모태로 미술인의 권익 보호와 미술가들이 전시회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이후에 임시 수도가 되면서 피난민이 모여들어 그때 피난 온 예술가들로 인하여 부산 광복동을 중심으로 미술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미술의 거리, 전시의 거리로 탈바꿈하게 된 이유는 늘어선 다방들이 화랑의 역할을 해 부산 화가들과 피난 화가들이 다양한 전시를 열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시는 대부분 순수 미술 위주의 소그룹 형태의 전시였다. 공예라는 개념은 부산에선 다소 생소한 분야였으나 1962년 경남공예협동조합이 설립되어 4년 뒤인 1966년에 현재의 부산공예협동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최초의 공예 산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는 개인 작가와 소상공인, 기업체 등 105명의 회원이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1960년대는 사회 각 분야에 걸친 변혁과 의욕이 충만했던 시기로 미술계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1961년 제1회 경남 재건 예술제 미술전 응용 미술 부문에 조성우가 특선을 하였으며, 5·16 혁명 1주년 기념[1962년] 예술전 공예부에 조성우, 김영호(金泳浩) 등이 참여하였다. 1962년 사단 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 제2회 회원전에 권수산[수예]·임삼순 등이, 3·1절 기념 미술협회전[1969년] 공예 부문에 천재동(千在東)[1915~2007]·최유현[수예] 등이 출품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 수학하고 온 천재동은 탈 제작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로, 한국의 전통 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우수한 민족적 가면을 창작해 왔으며, 한때는 토우 형태의 테라코타 소품에도 열중한 바 있다. 조성우는 나전 칠기 기법을 전수하여 통영 칠기의 전통 재현에 노력하였으며, 예술적인 작품성보다는 실용적이고 산업적인 공예 상품 생산에 주력하였다.
[정착기: 1970년대]
1970년 문화 전반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과 협회 결성, 대학에서의 공예 관련 학과가 개설되어 공예가들이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고 후진 양성을 위한 현대 공예 교육의 출발점이 되는 시기로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도자기에 이기주가 부산으로 내려와 경남공업고등학교 요업과에 재직하다 1973년 개설된 동아대학교병설실업초급대학 관광민속공예과의 교수로 이직하였고, 이후 목공예에 조일상이 교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듬해 이기주는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경성대학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김헌언, 권상오, 박수철, 이동일, 이경희, 김인권, 조귀현, 박무봉[작고] 등이 부산에서 대학의 공예 교육가로 후진 양성을 위한 1세대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상공미전[대한민국 디자인 전람회]과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을 통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여 공예 개념에 대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4년에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공예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부 정책으로 부산공예학교[부산디자인고등학교]가 설립되어 이동일, 오천학, 송명수, 이병학 등이 재직하게 되어 우수한 인재 능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초창기에 잠시 머물다 이후 대부분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1974년에는 부산산업디자이너협의회가 창립전을 부산 남도 화랑에서 개최하였다. 부산산업디자이너협의회는 조일상, 우양자, 박수철 등이 주축이 되어 부산 지역의 디자인, 공예 운동의 확대와 부산의 산업에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디자인과 공예가 함께 공동 발표의 장을 갖다가 각자 전문성을 살려 1980년부터는 독자 활동을 하게 되어 부산공예가회로 개편하였다.
1975년 제1회 부산 미술 대전의 공예 분과장에 김수석이, 심사 위원에는 천재동, 염태진 등이 참여하였다. 금상에는 김헌언[선율]이, 은상에는 권상오[함 75-8]가 각각 수상하였다. 1978년에는 동아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동미회 창립전이 로타리 화랑에서 개최되었으며, 오구환 등 15명이 출품하였다. 1979년에는 부산공예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움+하나[예얼도예가회]가 개최되어 곽희두 등 15명이 출품하였다. 이 시기에는 고등학교, 대학교 공예 전공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동문 중심으로 전시를 열었다.
[발전기: 1980년대]
1980년대는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열풍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88 서울 올림픽 등의 영향으로 미술 교육 및 창작 면에서도 서구화 중심의 영향, 전통 공예의 정체성 등 사회적인 이슈와 기능성보다는 조형성 위주의 작품이 눈에 띄게 확산되었다.
1981년 제1회 부산 미술제의 운영 위원에 공예가인 김헌언이 선정되고, 정영진 등 20명이 출품하였다. 1989년에는 부산도예가회협회가 창립되었다. 새로움을 추구하고 발전하는 도예 문화를 형성하고, 전통과 현대를 포괄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폭넓은 도자 조형을 추구하고자 설립하였으며, 초대 회장으로 이경희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KBS 부산 방송 본부 전시실에서 부산, 경상남도 지역의 도예가들 40명이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이 시기는 탈 기능의 조형주의 경합의 예술성을 지닌 국전이 급속한 확산을 보이며 부산의 작가들도 의욕적으로 참여하였다. 1981년 국전에서 박수철은 태피스트리로 대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색실로 씨줄 날줄로 엮어 자유롭고 회화적인 표현의 대형 작업을 주로 한다. 이후 구자홍과 이상호도 대상을, 우동민과 오구환도 각각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부흥기: 1990년대]
1990년대 공예계의 가장 큰 흐름은 현대 공예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탈 기능의 조형주의가 폭넓게 확산되는 경황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공예 본질의 생활 속의 정서 회복과 기능성으로서의 공예미의 복원, 대중과의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이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다. 1991년에는 부산 문화 회관에서 부산공예협회전이 개최되었다. 도자, 목실, 섬유, 금속 등 4개 단체가 격년제로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1995년까지 개최되다 무산되었다.
1992년에는 공예 분야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행사인 제1회 한일도예대학이 개최되어, 한일 도예 문화의 장으로 한일 양국의 문화적 역사성을 조형하고, 그 특징을 비교 연구하였다. 이 행사는 이기주, 권상인, 김현식이 주축이 되어 전국 2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994년에는 지방에서 처음으로 국제 도예 대전이 개최되어 국내 도예계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공모는 제1부 용도가 분명한 기물, 제2부 기물을 제외한 현대적 표현의 도예 작품으로 구분하였고, 189점이 출품되었다. 1994년에는 부산에서 최초로 예술 전문 교육을 위한 부산예술대학이 설립되었다. 1995년에는 부산미술협회 최초로 공예가인 조일상이 제23대 부산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98년에는 부산 시립 미술관 개관 이후 처음으로 공예를 주축으로 한 대규모 전시회인 ‘경계 해체와 표현의 확장’전이 개최되었다. 이는 기존의 공예 디자인이 일상에 용이하게 접근하고 장식하며 일상 그 자체를 수용하고 일체화되는 것이라면, 지금은 이를 좀 더 확대하여 장르를 벗어난 공예와 디자인의 경계 해체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 제기되는 문제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런 면에서 이 전시는 기존의 공예 디자인의 영역을 뛰어넘어서 삶이 무엇인지, 일상이 무엇인지를 결의하는 것이었다.
[융합기: 2000~]
2002년 ‘부산AG기념 디자인공예전’이 부산정보대학 청우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2003년 ‘부산의 디자인·공예 30년전’이 부산 시민 회관 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부산의 현대 디자인·공예 분야의 시작이라고 보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부산의 디자인 및 공예의 정체성을 찾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모색과 비전이 있는 흐름을 제시하여 부산 지역의 디자인·공예 분야의 작품성을 학술적으로 정립하고자 개최되었고, 여기에 구자홍 등 62명이 출품하였다. 2004년에는 공예의 국제적인 교류 확대를 위해 ‘부산 국제 공예 교류전’이 개최되었다.
2005년 부산미술협회 주최 제4회 오늘의 작가상·청년 작가상에 서상호가 공예 부문을, 2009년 금속 공예가 진영섭이 본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제4대 부산 시립 미술관장에 조일상이, 2006년 박수철이 부산디자인진흥원 초대 원장에 취임하였다.
2009년 부산 시민 회관에 한슬 아트샵을 개관하였다. 이곳은 일상과 예술이 만나는 공간으로 시민들의 문화적 감성 충족과 지역 문화 예술의 활성화를 위하여 일반 시민들과 작가들이 함께하는 친숙한 문화 공간이다. 한슬 아트샵을 통하여 시민은 보다 쉽게 예술을 접하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 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만남의 장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현재 10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 ‘삶에 물들다’전을 개최하여 시민들에게 보다 쉽게 미술의 향취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부산 문화 예술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2010년을 전후하여 부산 공예의 1세대인 이동일, 이기주, 김헌언, 조일상, 박수철 등이 30여 년간 부산 공예의 발전과 후진 양성을 위해 봉사하다 퇴임을 하게 된다.
부산의 공예는 현대 사회의 다변화와 더불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왔지만, 오늘날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공예 역시 계속된 경기 침체와 대학의 위기 등으로 어느 때 보다도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예와 사회와의 문화적 코드를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접목시켜 공예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다변적 취업의 기회가 제공되고, 공방을 운영하는 작가에게 생산과 소비에 있어 사회적으로 안정성을 가져올 수 있으며, 공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공예가 문화 영역으로부터 좀 더 열려 있는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공예가들의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통합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는 통합 문화를 요구하는 시대이다.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는 평면과 입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장르간의 경계가 없어지며, 독창적인 개념 미술을 확장하고 있다. 이제는 미술 장르간의 혼용과 타 예술 분야와의 융합을 과감하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공업과 인문학, 디지털 과학과 예술과의 접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통합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