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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달야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7524
한자 -達夜學校
영어의미역 Siddhartha Night School
이칭/별칭 실달야학교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 162[칠산동 239-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화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교육 기관
설립자 김봉환|차상명
설립 시기/일시 1921년 1월연표보기 - 개설
해체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해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4년 - 교실 신축
최초 설립지 싯달야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 162[칠산동 239-2]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 있었던 불교계 야학.

[개설]

1800년(정조 24)대부터 범어사(梵魚寺)는 부산 전역에 포교당 5개소를 설립해 운영하였는데, 1900년(고종 37)대 초기에 대부분의 포교당은 종교적인 기능뿐 아니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교육·계몽 활동까지 함께 수행하였다. 범어사에서는 포교당의 활동을 넘어서 정식 교육 기관으로 1908년(순종 2)에 불교 근대화 교육을 위해 정식 교육 기관으로 인가받은 사립 명정학교가 개교하였다. 1913년에는 명정학교 내에 보습 과정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당시 범어사에서는 사회 선도와 농사 계량을 목적으로 유일한 민간사업 기관인 범어사 농민진흥회를 설치하였다. 각 면별로 범어사 토지에 지부를 두고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농촌 진흥 운동의 주요 사업 중 하나로서 농민의 교양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에 강습회와 야학회 등을 개최하여 문맹 퇴치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설립 목적]

싯달야학교범어사 농민진흥회의 농촌 진흥 운동과 연결 지을 수 있는데,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저소득 농민 자녀들의 문맹 퇴치와 민중 교화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신학문과 한글 교육, 계몽 운동, 불교 대중 포교 교육을 통해 농민들의 발전과 민족정신 고취를 이루고자 하였다.

[변천]

싯달야학교는 1921년 1월에 범어사 3·1 운동에 참여한 명정학교 출신 졸업생 김봉환(金峯煥)차상명(車相明)[범어사 동래포교당 주지, 싯달야학교 교장]이 동래포교당[현재의 동래 법륜사로 1898년 범어사의 포교당으로 설치됨. 영도·서면 등 다른 지역의 포교당은 없어졌으나 법륜사로 현존하고 있음]에서 포교사로 활동하면서 동래불교청년회의 지원을 받아 개설하였다.

개교 이후 입학 아동 수가 해마다 늘어 1924년에 학교장 차상명의 노력으로 교실을 신축하였고, 그해 3월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1929년에는 학년을 4년제로 연장하였고 80여 명의 제6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당시 싯달야학교에는 교장 차상명과 교원 허진호(許辰鎬)·추월량(秋月亮)·박금수(朴金水)·임인수(林仁水) 등 4명이 근무하였고, 학생은 남자 120여 명에 여자 160여 명가량이 재학하고 있었다. 지원자 수는 많으나 시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경상남도 지역 최대 규모의 야학으로 성장하였으나 1945년에 해체되었다. 싯달야학교가 있던 범어사 동래포교당법륜사(法輪寺)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3·1 운동의 본거지이자 농민 운동의 산실로서 민중 교화와 민족정신을 배양하던 옛 정신을 이어 가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싯달야학교는 학생 교육 이외에도 농민 교육의 산실 역할도 수행하였는데, 1939년에 동래불교여자청년회가 가정부인들의 문맹을 깨치고자 12월부터 6개월간 동래실달학교 교실에서 야학회를 개최하였다. 국어와 조선어, 산술 등의 과목을 강습하였는데, 당시 강습생은 약 50여 명으로 40세 이상 특히 50~60대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싯달야학교는 경상남도 최대의 야학으로서 일제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청년 승려들과 가난한 농민에게 교육을 실시하여 사회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고,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힘이 되었다. 싯달야학교가 있던 포교당에 자리한 법륜사는 1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근대 영남 불심을 이끌어 온 본거지로서 대중 포교의 중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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