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7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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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貞義塾 |
영어음역 | Myeongjeonguisuk |
영어의미역 | Myeongjeong Residental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읍내로68번길 23-1[동부리 21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두진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변천]
명정의숙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1910년(순종 4)에 기장 지역에 세워진 민족 학당이다. 1904년(고종 41)에 한일 의정서를, 1905년(고종 42)에 을사 보호 조약을, 1907년(순종 1)에 한일 신협약을 맺게 되어 국권을 이미 잃어 나라 안이 어수선한 가운데 설립된 학교가 명정의숙이다. 1910년 국권 강탈 후 첫 기장면장이 된 권상중(權商重)은 정의감이 강하였던 부친 기장현감 권은후의 아들로 애국심이 대단하였다. 이에 기장 지역의 유지들과 힘을 합해 독립을 위한 인재를 기르기 위하여 명정의숙을 세웠다.
권상중과 지역 유지들이 세운 명정의숙은 여학교였다. 이때 남학교인 보명학교도 함께 설립하였는데, 명정의숙과 보명학교는 같은 건물에 있었다. 교사는 처음에는 기장면 동부리 하마정(下馬亭) 근처에 있었으나, 1913년에 현 장관청(將官廳) 자리로 옮겼다. 1914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기장의 독립운동가인 권상중의 딸 권은해와 권복해가 명정의숙의 학생이었다. 명정의숙의 폐교 시기는 알 수 없다.
[교육 활동]
명정의숙은 여성 계몽 운동에 중점을 두고 교육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항일 운동에 대한 여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명정의숙 학생들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교장이었던 박세현(朴世鉉)이 1917년 기장광복회 거사 계획이 탄로나 일경에 잡혀가서 회원 명단과 배경을 추궁당하였으나, 끝내 함구하고 무자비한 고문 끝에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옥사로 교장을 잃은 명정의숙 학생 40여 명은 3·1 운동 때 기장 만세 사건에 합류하여 교장을 고문 치사시킨 일제 경찰에 저항하였다. 또한 명정의숙 학생들은 3·1 운동 주동의 한 사람으로 잡혀가 옥사한 의사 구수암의 장례를 면민장으로 이끌어 내고, 장례 때 명정의숙 학생인 권은해가 조사를 읽고 만장기를 앞세워 항의하였다.
국권 강탈 후 교육 대중화 운동으로 설립된 명정의숙은 기장 지역에서 3·1 운동에서 시작하여 기장여자청년회, 기장청년회 등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포괄하는 다양한 갈래의 민족 해방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가와 상징물]
1. 교가[작사 박세현]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시대 구경 어서 가세/ 우리들이 이어받을 새 시대를 창조하세/ 춘풍삼월 화개절은 꽃구경도 좋거니와/ 한상구추 낙엽시는 단풍 구경 좋을시고/ 산고수려 곳곳마다 금수강산 분명하네/ 옥야천리 천부국에 문물까지 겸비로다/ 행복이여 행복이여 우리 대한 행복이여/ 애야 애야 애국하세 생사장사 의무로세/ 좋고 좋은 이 강산을 촌토척지 남 줄소냐/ 무궁무진 천부재원 남북 강린 침탈하네/ 불행이여 불행이여 자강 못한 불행이여/ 학도들아 학도들아 분골하고 세신하여/ 국권 회복 어서 하고 동포 구재 바삐한 후/ 우리 강토 화육 중에 악토안업 하여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