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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875
한자 東萊靑年同盟機張支部
영어의미역 Gijang Branch of the Shinganhoe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28년 5월 27일연표보기 -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1년 4월~5월연표보기 - 해체
최초 설립지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었던 동래청년동맹 소속 지부.

[설립 목적]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는 청년 운동을 무산 계급 운동에서 전민족적 운동으로 확대하고, 모든 청년 단체를 지역적 단일 청년 동맹으로 재편성하여 청년 운동의 대중적 기반 확대와 운동의 통일을 모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27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은 새로운 운동 방침에 따라 ‘1개 지방 1개 동맹’주의의 조직 방침을 정하고, ‘청총-동맹[군]-지부[면]-반[리]’로 이어지는 조직 체계를 확립하였다. 동래군에서는 동래청년동맹이 1928년 2월 26일 창립되고,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는 5월 27일 정진 청년 회관에서 창립되었다.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는 청년 운동의 대중적 기반 확대와 운동의 통일을 위해 기장정진청년회의 발전적 해소를 통해 창립되었다. 창립 대회에서 임시 집행부로 김태영, 김주엽을 선출하였고 동래청년동맹원 박문호 등의 축사가 있은 후 집행위원장에 김태영, 위원으로 오주석, 권삼봉, 김주현, 김규엽, 김귀조 등이 선출되었다.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 아래 반 조직은 1929년 2월 송정리죽성리에 반을 설치했고, 2월 9일 시랑리, 1930년 2월 당사리에도 각각 반을 설치하였다.

1929년 이후 정기 총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금지되는 속에서 1930년 2월 23일 제9회 집행 위원회를 열고 동래 학생 사건과 관련된 집행위원장 김동득(金東得)이 사임하고 대리로 구일심을 선출하였다. 이후 1930년 8월 12일 위원장 구일심의 사회로 열린 집행 위원회에서 8월 20일 정기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일제 경찰 당국이 금지시킴으로써 연기되었다. 결국 1930년 10월 24일 대라리 박맹표의 집에서 의장 김규엽과 서기 이소희의 주관 하에 제6회 정기 총회를 열어 집행 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김규엽이 집행위원장에 선출되고 10명의 위원이 선출되었다. 그 후 조선청년총동맹의 해소 논의가 1930년부터 본격화되고 1931년 5월 무렵 해소된 것으로 보아,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 또한 1931년 4월~5월 사이에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는 창립 대회와 정기 총회에서 신간회 기장지회 실현, 근우회 동래지회 기장분회 설치 촉성 및 기존 청년 단체 해체와 운동 노선의 통일 등을 안건으로 상정하고 있어, 당시 청년 운동의 고립 분산성을 극복하고 운동의 통일성과 대중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지부에서는 교양 작업으로 하기 강좌를 개최하고 노농 운동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노농 단체와 농촌 야학에 대한 조사를 행하였다. 또 정구 대회를 개최하거나 남조선 축구 대회에 출전 하는 등 체육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8년 8월 제1회 정기 총회에서는 노농 단체에 대한 사전 조사가 끝나고 대중적 토대 확보를 위해 반조직 확립, 노동 단체 진흥, 전위 분자 양성, 국제 무산 청년 데이 기념 등을 논의하였다. 1928년 9월 1일 국제 무산 청년 데이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기 위해 선전 벽보를 배포하다 체포되기도 하였다. 또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에서는 송정리, 죽성리, 시랑리, 당사리 등에 반을 설치하였고 반이 설치되지 않은 곳에는 구일심, 김규엽 등을 강사로 파견하여 강좌를 개최하는 등 반 설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교양 부분에 있어서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야학을 활성화하는데 노력하였다.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는 청년 운동의 조직·교양·선전·투쟁 문제 뿐 아니라 농민·노동·신간회·근우회·소년 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활성화에도 노력하였고 특히 어민 운동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래청년동맹 기장지부는 지역 사회 운동의 중심체로서 신간회 지회와 기장농민조합의 설립을 주도하고 청년 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기장농민조합 운동으로 운동의 중심이 이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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