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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473
한자 東萊都護府使
영어의미역 Chief of Dongnae Dohobu
이칭/별칭 동래 부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방관
품계 정3품
시행 시기/일시 1547년 - 임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47년연표보기 - 동래현에서 동래도호부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10월 1일연표보기 - 동래 도호부를 부산부로 개칭
비정 부산광역시

[정의]

조선 시대 동래 도호부를 다스린 정3품의 관직.

[개설]

조선 전기 태조는 처음으로 동래에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 겸 판현사(判縣事)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종5품]으로 바꾸었다. 동래현에는 외관직으로서 현령이 임명되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에서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동래 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가 임명되기 시작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전국의 도호부는 75개로 경기도 8곳, 충청도 1곳, 경상도 14곳, 전라도 7곳, 황해도 6곳, 강원도 7곳, 함경도 18곳, 평안도 14곳이 있었다. 75명의 도호부사 가운데 동래 도호부사[동래 부사]에 한해 정3품 당상관이 임명되었다. 다른 지역의 도호부사[종3품]와 격을 달리한 것이다.

동래 도호부사에 당상관을 임명한 이유는 동래 지역의 군사 및 외교상 비중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은 뒤 한때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99년(선조 32)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 동래 도호부사의 임기는 900일[2년 6개월]이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이안눌(李安訥)이 부임한 뒤부터 1863년(철종 14)까지 255년간 193명의 동래 도호부사가 교체되었다. 대부분의 동래 도호부사는 주어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평균 1년 남짓의 짧은 기간 재임하였다.

동래 도호부사 가운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교체된 자가 많은 편이다. 특히 경상 감사에 의한 정기적인 근무 성적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거나, 암행어사의 부정기적인 규찰에 적발되는 등 징계를 받아 중도에 파직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왜관(倭館)의 관리, 왜관 거주 일본인과 관련한 불상사로 징계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1859년(철종 10)에 파직된 김석(金鉐)은 창기(娼妓)의 왜관 잠입 사건이 드러나 파직되었다. 김석은 재임 중 동래부 읍성을 수리하는 등 활발하게 직무를 수행하였으나 창기 잠입 사건을 사전에 적발·단속하지 못하였다 하여 부임한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파직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 국경의 요지에서 활동하던 동래 도호부사의 어려운 근무 조건을 짐작할 수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에 설치된 동래현은 1547년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동래 도호부로의 승격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겪고, 1544년(중종 39) 동래 관할의 왜관을 설치한 직후에 단행되었다. 조선 정부가 동래 도호부의 군사적·외교적 중요성을 인정한 결과이었다.

[담당 직무]

동래 도호부사는 경상 감사의 지휘 감독을 받으면서 관내의 행정·사법·군사권까지 행사하는 방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동래 도호부의 행정은 중앙 정부의 육조 체제를 모방한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의 육방의 체계에 속한 향리에 의해 집행되었다. 조선 후기 동래 지역은 더욱 군사적으로 중시되었다. 이 일대의 수군은 경상 좌수영(慶尙左水營)의 경상 좌수사가 관할하였으며, 육군은 동래 도호부사가 관할하였다. 효종동래 독진(東萊獨鎭)을 설치하여 동래 도호부사가 겸임하도록 조치하였으며, 양산(梁山)·기장(機張)의 군병을 함께 통솔하게 하였다.

[관련 기록]

『고종실록(高宗實錄)』 12권 고종 12년 8월 10일[갑술] 기사에 “만경전(萬慶殿)에 나아가 하직하는 동래 부사 홍우창(洪祐昌)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동래부는 다른 곳과는 다르며 요즈음은 변정(邊情)이 더욱 예측하기 어려우니 매사를 착실한 마음으로 해 나가면서 대양(對揚)[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그 마음을 널리 백성에게 알림]할 계책을 극진히 하라. 비록 조정의 처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편의에 따라 일해 나갈 것이며, 저들에게 개유(開諭)할 때에는 각별히 조심하며 임기응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군용(軍容)이 쇠잔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수선(修繕)을 도모하되 인심을 얻는 것을 제일 급선무로 삼으라’ 하니, 홍우창이 아뢰기를, ‘현재 본부(本府)의 사무가 전에 비해 배나 많아졌으니 걱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 전기 동래현은 1547년에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동래 현령을 대신하여 동래 도호부사가 임명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0년 10월 1일 동래부를 부산부(釜山府)로 개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기 대일(對日) 관계의 전진 기지인 동래 지역에 파견된 동래 도호부사는 다른 지역의 지방관에 비해 특별히 중요한 국방 및 외교 업무를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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