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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492
한자 金鉐
영어음역 Gim Seok
이칭/별칭 금초(錦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
대표관직 동래 부사|성균관 대사성
출생 시기/일시 1804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0년 - 증광 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58년 - 병조 정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58년 11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59년 6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파직
활동 시기/일시 1867년 - 함경도 덕원부에 유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 『국역 내부 일기·다대진 공문 일록』에 『내부 일기』 번역문 및 영인본 수록
출생지 상주 - 경상북도 상주시
거주|이주지 상주 - 경상북도 상주시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유배|이배지 함경도 덕원부 - 함경남도 덕원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금초(錦樵).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상기(金相箕)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김직이며, 아버지는 진사 김재현(金載顯)이다. 김석의 집안은 김상기 대에 상주에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김석(金鉐)[1804~?]은 1850년(철종 1) 4월 철종(哲宗) 즉위식을 기념하여 치러진 경과 증광 별시(慶科增廣別試)에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5년(철종 6) 홍문관 벼슬 예정자 목록인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올렸고, 1858년(철종 9) 병조 정랑(兵曹正郞), 그해 11월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김석은 12월 초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이듬해 1월 임지로 갔다. 그러나 그해 6월 파직되어 재임 기간은 반년도 안 된다. 그 사이에 동래 부사로서 처리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내부 일기(萊府日記)』를 남겼다.

김석은 재임 중 동래부 읍성 등 성곽의 보수·유지에 힘써 1859년(철종 10) 3월부터 2개월 남짓 성곽 개수 공사를 지휘하였다. 경비는 환곡과 식리전(殖利錢)의 이자, 임시로 징수한 잡역세로 충당하였다. 이양선의 출몰 현황과 움직임을 중앙에 보고하는 것도 동래 부사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1859년(철종 10) 5월 남촌면(南村面)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이양선이 출현하자 경계 태세를 갖추어 물러나게 하였다.

대일 외교 및 무역 통로인 왜관의 관리도 동래 부사가 할 일이었기 때문에 잠상(潛商)이나 백성들의 왜관 출입을 수시로 단속하였다. 1859년(철종 10) 6월 동래부 기생이 몰래 왜관에 들어갔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물어 파직당했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 일어나고 5년 뒤인 1867년(고종 4) 김석은 장응표(張膺杓) 등과 더불어 영남의 대표적인 무단 토호(武斷土豪)로 지목되어 농민층을 선동해 관권(官權)에 도전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덕원부(德源府)로 유배되었다. 그 뒤 오랫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다가 1874년(고종 11)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학문과 저술]

동래 부사 재임 시 처리한 업무 사항을 일지 형식으로 적은 『내부 일기』를 남겼다. 『내부 일기』에는 동래 부사의 부임 절차, 성곽의 순력, 준천(濬川) 및 축성, 옥사(獄事)의 처분, 형벌, 청원의 처리, 왜사(倭使)의 접대, 이양선 출몰 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사건의 발생을 알리는 장계(狀啓)와 첩보(牒報), 감영의 지시 사항과 그 처리, 새로운 절목(節目)에 대한 논의와 내용, 각 면에 하달한 전령(傳令) 등이 포함되었다. 『내부 일기』를 통해 19세기 중반의 동래부 행정을 살펴볼 수 있다. 44쪽의 필사본으로,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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