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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291
한자 金光一
영어음역 Gim Gwangil
이칭/별칭 김변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변호사
성별
대표경력 국회 의원
출생 시기/일시 1939년 9월 11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2년 2월 - 합천초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5년 2월 - 경남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8년 2월 - 경남고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62년 2월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대구지법 판사에 임용
활동 시기/일시 1973년 - 반공법 사건 무죄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74년 - 부산광역시에서 변호사 개업
활동 시기/일시 1975년 - 국제사면위원회,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76년 - 명동 선언 사건, 책방 골목 사건 변론
활동 시기/일시 1980년 -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 혐의로 조사
활동 시기/일시 1982년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변론
활동 시기/일시 1983년 - 부산민주시민협의회 결성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85년 - 민주헌정연구회,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 이사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88년 -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국회 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90년 - 3당 합당 거부, 민주당 창당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92년 - 통일국민당 최고 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94년 - 초대 국민고충처리위원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95년 -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97년 - 대통령 정치 담당 특보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2010년 5월 24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일본 도쿄[東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합천군
학교|수학지 합천초등학교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316
학교|수학지 경남중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3가 12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경남고등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3가 1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121
활동지 전주지방법원 - 전라북도 전주시
활동지 국제사면위원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부산시 변호사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민주화추진협의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부산민주시민협의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통일민주당 - 부산광역시 서구
활동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 서울특별시
묘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부산중앙교회 묘원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이자 국회 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가계]

김광일(金光一)은 1939년 9월 11일 일본 도쿄[東京] 인근에서 아버지 김우길과 어머니 김순복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45년 해방이 되자 김광일의 집안 식구들이 모두 귀국하여 선대의 향리인 경상남도 합천에 정착하였다. 귀환 동포인 그의 집안은 살림이 어려웠지만 김광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경남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중학교 무렵부터 교회에 나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부산에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경남중학교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김광일은 시위에 주도적으로 가담하여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에 가입하여 통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활동으로 인해 김광일은 5·16 군사 정변 후 마포경찰서에서 41일간 구금되었다. 1962년 김광일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64년 김광일은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졸업한 후 육군 법무관에 입관되었다. 그는 5군단 사령부에 배속되었는데 군량미 횡령 사건을 적발하여 수사하려고 하여 군단장과 정면 대립하는 상황까지 갔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직분을 다하는 용기를 보였다. 1967년 법무관에서 전역하여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된 김광일은 1973년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영남대학교 학생 박준성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북한 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기소된 이 사건에서, 김광일은 국민은 알 권리가 있으므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이 일로 전주지방법원으로 좌천되자 김광일은 보복 인사에 항의하여 그 해 9월 1일 법관직을 사임하고 9월 14일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75년 『동아 일보』 광고 탄압 사태가 벌어지자 그는 격려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광고를 본 작가 김정한(金廷漢)과 만나 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 야당과 재야 세력이 연합한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였다.

1976년에 김광일은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명동 선언 사건으로 기소된 윤보선(尹潽善), 김대중(金大中), 문익환(文益煥) 등을 변론하였다. 같은 해 김광일은 부산 중부교회 청년부에서 발행한 『책방 골목』의 필화 사건으로 기소된 조태원 등도 변론하였다. 1977년에는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대중을 월 2회 이상 접견하여 근황을 외부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8년에 김광일은 엠네스티 부산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김대중의 변호를 중단하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자, 변호사법 위반 사건을 조작한 공안 당국의 주도로 김광일의 구속 영장이 신청되기도 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 항쟁이 일어나자 계엄사 합동 수사단은 그를 비롯한 부산의 재야인사들을 검거하여 항쟁의 배후 조직을 조작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7일간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박정희(朴正熙)가 피살되는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되면서 석방되었다.

1981년 부림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공범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변론을 할 수 없었으나 사건 관련자의 가족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1983년 공해문제연구소의 설립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1985년에는 민주헌정연구회 이사와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 이사로 선임되었다.

1987년 박종철(朴鐘哲)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2·7 추도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지만, 6월 민주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88년에는 제13대 총선의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 정치관련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 악법개폐특별위원회 위원,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 통일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89년에 김광일은 통일민주당 기획조정실장에 선임되었다. 1990년에는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삼당 통합으로 민자당이 결성되자, 이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는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어 수서 사건 백서를 발간하였다. 1991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국제의원연맹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92년에 김광일정주영(鄭周永)이 주도한 통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 위원에 선임되었으나 대통령 선거 후 탈당하였다.

1994년에 김광일은 김영삼(金泳三) 정부에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여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5년에는 신한국당 서울특별시 송파 갑구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대통령 비서실장에 취임하여 상당 기간 봉직한 후 사임하였다가, 1997년에 다시 대통령 정치 담당 특별 보좌역에 취임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끝난 후 김광일은 다시 변호사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지병을 얻었는데, 요양을 통해 다소 회복한 듯했으나 끝내 2010년 5월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글 모음집인 『선서와 거짓말 대회』[1988]가 있다.

[묘소]

묘소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부산중앙교회 묘원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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