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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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佛敎 |
영어의미역 | Buddhism during the Harbor Opening in Busan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연주 |
[정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1910년까지 부산 지역의 불교.
[개설]
개항과 더불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에는 범어사 출신의 개화사상가들이 활동하였다. 그들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 사회를 지향하고자 노력하였지만, 한편에서는 일본 불교 세력들의 적극적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맞서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 불교계는 선풍(禪風)을 진작시키면서 한국 불교의 정맥을 계승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 동안 산중에 머물렀던 한국 불교는 이른바 종교 경쟁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범어사와 개화사상의 전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당시 개항의 중심이었던 부산은 일본 등 구미 열강들의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면서 다른 지방에 비해 일찍 개화사상에 눈 뜰 수 있었다. 당시 개화의 주도 세력들 가운데 많은 불교인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승려 이동인(李東仁)과 거사 유대치(劉大致, 劉大癡)가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 개화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범어사 출신으로 20대의 이동인은 일본인들과 자주 만나면서 비교적 빨리 개화사상에 눈뜰 수 있었다. 이동인은 부산에 있던 일본 동본원사(東本願寺) 승려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의 알선에 의하여 1879년부터 일본을 출입하였다. 이동인의 밀항은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대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요인들의 지도를 받아 이루어졌다. 일본 밀항을 통하여 근대 서구의 문물이 담긴 책들을 개화파 인사들에게 전해 주었고, 개화파 인사들은 이 책을 돌려가면서 읽고 개화사상을 흡수하였다. 그러나 이동인은 1881년 3월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이동인은 승려로서 불교계가 근대 문물을 접하기 이전 시기에 개화사상을 흡수하고 근대 사회로 지향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하였다는 점에서 선각자적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부산 지역에서의 일본 불교계의 포교]
개항과 더불어 일본 불교는 일본 침략 세력의 앞잡이로서 조선 불교계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에서 일본 불교의 포교가 적극적이었다. 1877년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은 오쿠무라 엔신 등을 파견하여, 1878년 12월에 대곡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 분원을 부산에 개원하였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대각사(大覺寺)에 분원이 설치되었고, 오쿠무라 엔신은 조선어와 조선 풍속을 잘 아는 승려를 육성하기 위해 1878년에 부산에 ‘[조]선어학사’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범어사 출신인 승려 이동인은 대곡파와 개화파 등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1881년에는 일련종(日蓮宗)의 와타나베 이치운[渡邊日運]이 부산에 건너와서 일종회당(日宗會堂)을 건립하였고, 1890년에 일본 교토(京都) 묘각사(妙覺寺)의 주지 아사히 미츠[旭日苗]가 부산으로 건너와서 조선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장(管長)에게 품신(稟申)하여 일종해외선교회(日宗海外宣敎會)를 조직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이후 을사늑약 조약 체결 때까지 정토진종을 비롯하여 임제종, 일련종, 정토종, 조동종, 진언종 등 일본의 거의 모든 종파가 부산을 비롯한 각처에 포교소나 사찰을 건립하고 한국 승려들을 포섭 내지는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파격적인 방법은 조선 시대 불교 탄압의 상징이었던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하였다. 그리고 일본 불교계는 친일승 이회광(李晦光)을 매수하여 일본불교 조동종으로 한국 불교전체를 그 아래로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사찰령」이 공포되는 1911년까지 조선에 상륙한 일본 종파는 당시 12개 종단 49개 종파들 가운데 6개 종단 11개 종파에 달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일본 불교인 정토진종을 필두로 그 첨병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이 그 첫 번째 포교 대상지였던 것이다.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 정맥의 계승]
이에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 불교계는 적극 대응하였다. 19세기 초 선(禪)에 관한 논쟁이 일단락되면서 불교계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게 되는데, 수선결사(修禪結社)가 범어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허(鏡虛) 성우(惺牛)는 1900년에 범어사에서 선원을 개설하고, 1902년에는 『선문 촬요(禪門撮要)』를 편찬하였으며 이듬해 결사를 주도하였다. 경허가 범어사에 주석할 때 그의 영향을 받은 범어사 주지 오성월(吳惺月)은 1899년 음력 10월 금강암주 월송의 합의로 금강암 선원에서 선원 개설하였고, 1901년에는 해인사 수좌와 함께 발기하여 내원암 선원을, 1905년 이담해(李湛海), 포응 등과 함께 내원암 선원을 개설하였다. 1906년 6월 원효암, 그리고 1909년 안심료(安心寮)·응당, 1910년 10월 대성암 등에 선원과 선회를 창설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1900년 초의 선풍 진작 등 범어사가 행한 일련의 활동은 1800년대 이후 구축한 각종 계(契)의 조직과 활동이 토대가 되었다. 당시 여러 사찰들은 어려운 사찰 경제를 타계하고 불교 현실에 대한 자각이 싹트게 되었는데, 이 때 원활한 사원 경영을 위하여 계 조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곳이 바로 범어사이다. 범어사는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조직한 계 가운데 하나가 갑계로서 이 계가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의 확충은 훗날 포교당 설치와 같은 교육 사업은 물론 선풍 진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에 범어사는 1910년 한국 불교의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서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