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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511
한자 朝鮮時代-佛敎
영어의미역 Buddhism in the Joseon Dynasty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연주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부산 지역에 나타난 불교문화의 양상.

[개설]

조선 시대의 불교는 조선 건국 후에 숭유 억불(崇儒抑佛)의 이념에 따라 성리학적 지배 질서가 강조되고 억불 시책이 시행됨에 따라서 그 위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성리학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보급되면서, 서원이 사찰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에 불교계는 산중으로 들어가 산중 불교로 급속히 전환하여 극심한 억압과 핍박 속에서 어렵게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부산 지역의 불교계는 임진왜란으로 고찰과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고, 억불 정책과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조성 등으로 사원 경제가 피폐해졌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범어사가 중창되고, 갑계 등을 통하여 사원 경제를 개선시키는 등의 자구 노력을 통하여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는 산실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조선 시대의 주요 사찰]

조선 전 시기에 걸쳐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난 부산 지역의 사찰은 다음과 같다. 금정산범어사와 효의사(孝義寺)를 비롯하여 마하사, 선암사, 운수사, 국청사, 해월사, 명월사 등과 기장의 선여사, 안적사, 장안사, 척반암, 위정사, 옥정사 등 14개가 조사되었으나 자세한 기록은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명종실록(明宗實錄)』에 따르면 “1553년(명종 8) 5월에 사간원에서 동래 효의사(曉義寺) 주지승 원감(圓鑑)을 추문하여 죄를 주기를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금정산의 효의사(孝義寺)와 동일 사찰이거나, 아니면 별개로 효의사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지역 사찰의 역할]

부산 지역에도 숭유 억불책이 시행되어 사찰들은 그 기능을 일부 상실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선암사, 즉 견강사(見江寺)는 왜 사절 접대소로, 범어사·국청사(國淸寺) 등은 왜 침략 수비소·공물 생산 담당소 등 군현 정부의 천역·군역 담당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사찰은 천역·군역 담당소의 역할을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민간 신앙의 대리 역할을 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범어사를 비롯한 금정산·황령산 등의 고찰(古刹)이 방화·약탈되어 다수의 소중한 문화재가 없어져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범어사의 중창]

범어사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곧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묘전(妙全)·현감(玄鑑)·계환(戒環)·법인(法仁)·천원(天元)·덕균(德均) 등이 법당 및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집기들을 갖추어서 중창하였다. 1684년(숙종 10)과 1700년(숙종 26)에 해민(海敏) 화상의 주도로 비로전이, 명학 화상의 주도로 팔상전과 불이문 등을 각각 건립하였다. 1700년 동계(東溪)라는 사람이 범어사의 창건과 유래, 중창의 과정, 그리고 가람의 위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범어사 창건 사적(梵魚寺創建事蹟)』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 뒤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찰의 규모를 넓혔다.

[사명 대사의 활약]

조선 시대 부산 불교계의 동향에 있어서 사명 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의 활약이 주목된다. 1544년(중종 39)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고나리에서 출생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입적한 사명 대사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승병장(僧兵將)이다. 사명 대사는 임진왜란 전후로 3차에 걸쳐 부산 지역에 머물면서 활동하였다.

첫 번째는 1594년(선조 27) 울산 서생포에 주둔했던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영중(營中)을 3차 정탐할 때이다. 정탐을 마치고서는 부영(釜營)과의 사무 연락 때문에 울주를 통하지 않고 동해안을 통해 기장, 송정, 해운대 길을 통한 것 같다. 두 번째는 1601년(선조 34) 자성대를 수축할 때이다. 세 번째는 1604년(선조 37) 2월 21일 은사 서산 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의 열반(涅槃)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비변사(備邊司)를 통하여 전교(傳敎)가 강원 감사(江原監司)에게 전달되었다. 전교의 내용은 사명 대사에게 대마도(對馬島) 파견의 명이 내려진 것이었다.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탐적사(探賊使)로 파견되어 그들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1604년 6월 8일 전교를 받고, 7월 1일 서울을 떠나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8월 2일 사명이 국명을 받고 대마도로 떠나기 전 자기가 쌓아 올린 부산진성, 감만포, 좌수영을 순회하며 점검하기도 하였다. 곧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서 덕천막부(德川幕府)와 담판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1605년(선조 38) 4월에 3,000여 명의 포로와 같이 동행했던 삼준상인(三俊上人), 법원상인(法源上人), 혜구(惠球), 혜은(惠誾), 준사(俊師) 등의 스님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조선 후기 승군 조직]

조선 조정은 18세기 봉건 질서 해체기에 승려들이 조직적이고 단합된 역량을 구축할 수 없도록 부역 승군(僧軍)으로 대규모 요역에 징발되게 하였다. 특히 부산 지역의 승군과 관련하여 『동래부 축성 등록(東萊府築城謄錄)』에 따르면 1731년(영조 7)의 동래부 축성역에 경상도 65개 읍에서 징발된 승군의 수가 모두 7,901명에 달했다. 그중 동래부의 승군은 두 차례에 걸쳐 980명이 징발되었고, 그 부역 일수도 1차 34일, 2차 55일에 달하여 일반 백성들보다도 매우 가혹한 부담이었다. 아울러 산성(山城)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형태의 승작대(僧作隊)를 두어 승역(僧役)을 부과하였다.

1713년(숙종 39)에 동래 금정산성의 승군작대를 설치하여 해월사(海月寺)국청사(國淸寺)의 승도 100여 명뿐만 아니라 범어사 승도 약 300여 명 등을 동원하였다. 국청사에 ‘금정산성 승장인’이라는 철제 인이 보관되어 있어 승군작대의 사령부가 있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아무튼 승작대는 사원의 경제력 피폐로 이어졌다. 일부 승려들은 개별적으로 탁발, 전지(田地)의 개간을 비롯하여 누룩 만들기, 방아 찧기, 품팔이까지도 하여 사원 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개별적인 소량의 수입만으로는 사원을 운영하는데 한계를 가졌고,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찰은 계(契)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범어사의 경우 1811년(순조 11)부터 1930년 사이에 갑계(甲契)를 통해 사원 경제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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