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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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Kiln Site |
이칭/별칭 | 요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가마가 있던 터.
[개설]
가마는 흙으로 빗어 만든 토기·옹기·자기·기와 등을 굽기 위해 땅을 파거나 지붕을 덮어 씌워 만든 시설을 말하며, 가마의 흔적이 남은 곳을 가마터라고 한다. 가마의 기본 구조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연소실], 그릇을 재워서 굽는 소성실, 연기가 나가는 굴뚝[배연구], 아궁이의 재를 버리는 회구부로 이루어졌다. 옹기와 자기 가마에는 소성실로 출입하기 위해 소성실의 한쪽에 여러 개의 측구를 만들었다.
[삼국 시대의 가마터]
부산 지역에는 토기·기와·옹기·자기 등을 구웠던 삼국 시대의 가마터가 기장군과 강서구, 금정구 일대에서 확인되었다. 토기를 구운 가마로는 기장군에 있는 명례리 토기 가마터, 일광면 청광리 산3번지에 있는 에코파크 조성 사업 부지의 가마터,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임석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1. 명례리 토기 가마터
명례리 토기 가마터는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 도야 마을 서북쪽의 얕은 구릉 경사면에 위치한다.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고,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한다. 가마의 크기는 길이 800㎝, 최대 너비 90㎝이고, 잔존 깊이는 40㎝이다. 가마는 연소실과 소성실이 있으며, 연도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소실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고, 바닥에서 낮은 단이 만들어지고 소성실로 연결된다.
2. 청광리 토기 가마터
기장군 일광면 청광리 에코파크 조성 사업 부지에서 2기의 토기 가마가 조사되었는데, 6세기에 조업한 것으로 보인다. 가마는 34~41m 사이의 능선 사면에 위치하며, 등고선 방향과 직교되게 만들어졌다. 가마의 잔존 상태가 양호한 1호 가마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를 이루는 구릉 사면의 40m에 위치하는 지하식 등요(登窯)이다. 가마는 기반층인 황갈색 풍화 암반층을 굴착하여 만들었고, 회구부·아궁이·소성실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가마의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고,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하는 북서~남동 방향이다.
가마의 전체 규모는 길이 500㎝, 최대 너비 138㎝, 잔존 최대 깊이 50㎝이다. 아궁이의 재와 찌꺼기를 버린 회구부의 규모는 길이 300㎝, 너비 148㎝, 깊이 15~20㎝이다. 아궁이는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이고, 크기는 길이 230㎝, 최대 너비 104㎝, 잔존 깊이는 33㎝이다. 아궁이 바닥에서 소성실로의 연결은 30㎝ 높이의 수직을 이룬다. 소성실은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이고, 길이 270㎝, 최대 너비 138㎝, 잔존 깊이는 50㎝이고, 소성실 바닥은 단 없이 경사지며, 경사도는 18°이다. 소성실 바닥은 불을 맞아 소결되었고, 연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궁이와 소성실에서 도질토기편(陶質土器片)이 확인되었다.
청광리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아궁이의 길이가 길고 소성실 길이가 짧은 다소 특이한 형태이다. 아궁이와 소성실의 연결이 단을 이루고, 길이가 270㎝로 짧고,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인 점 등은 6세기 이후 신라 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와 공통점이 있다.
3. 임석 유적의 토기 가마터
임석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 가마터는 6세기 전반 삼국 시대 고분군이 조성된 구릉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며, 지하에 굴을 파서 만든 지하식 등요이다. 아궁이 부분은 사유지라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마는 굴뚝 쪽이 넓고, 아궁이 쪽으로 가면서 좁아진다. 확인된 전체 길이는 445㎝, 최대 너비 150㎝, 최소 너비 90㎝이다. 소성실의 바닥은 비스듬하게 경사를 이루는데, 경사도가 13°이다. 굴뚝은 소성실 바닥이 ‘ㄴ’자 형으로 꺾이면서 위로 올라간다. 소성실의 끝 부분에서 10여 점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적갈색 연질완(軟質碗)이고, 도질제의 항아리편도 포함되어 있었다.
4. 삼국 시대 토기 가마터의 특징
부산 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5세기 후반 이후의 것이고, 그 이전에 조업한 토기 가마는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무덤에 많은 수량의 토기를 부장한 4~5세기 때 토기를 생산한 토기 가마는 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향후 조사가 기대된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부터 삼한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가마에 대한 조사도 전무한데, 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부산 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의 예가 매우 적어 가마의 구조와 형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길이가 긴 장방형과 소성실 바닥 경사도가 낮은 구조에서 소성실 길이가 짧아지고 가운데의 너비가 넓어져 평면 형태가 고구마형을 이루고, 아궁이와 소성실 사이에 단이 생기는 구조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마가 한곳에 집중해서 여러 기가 동시에 조업한 양상은 발견되지 않았고, 1기 내지 2기가 조업을 한 형태로서 대규모 생산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규모 단위로 토기를 생산하여 주변 마을과 무덤의 부장품으로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명례리 토기 가마터에서는 연질 토기(軟質土器)도 확인되어 한곳의 토기 가마터에서 도질 토기와 연질 토기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 가마가 1기 내지 2기로 조업한 사례는 향후 토기의 생산과 공급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
[고려 및 조선 시대의 가마터]
1. 고려 시대의 가마터
고려 시대의 가마터는 강서구 범방동에서 청자 생산 유적이 조사되었지만, 대부분의 가마가 파괴되어 구조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곳에서 여러 기의 가마터가 확인되어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청자가 대량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는데, 기장군 장안읍 오리 신리 마을에 청자 생산 유적이 있는 점으로 볼 때 자기 가마는 분명히 존재하였다.
2. 조선 시대의 가마터
조선 시대에는 부산 지역에서 자기와 기와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북구 구포 일대와 금정구 남산동 일대, 기장군 장안과 정관 일대에서 자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특히 기장군 장안과 정관 등지에서 분청사기 또는 백자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 지역 일대에 많은 자기 생산 유적이 분포한다. 상장안 분청사기 가마 유적과 하장안 유적 분청사기 가마터가 조사되어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가마 구조는 어느 정도 윤곽 파악이 가능하다.
상장안 분청사기 가마 유적은 불광산 능선이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구릉에 위치한다. 이 일대에 여러 기의 자기 가마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릉 남쪽 말단부에서 1기가 조사되었다. 아궁이·소성부·연도부·동쪽 요체와 폐기장 사이의 판축부·폐기장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길이는 약 25.5m이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에 가깝고, 아궁이 쪽에서 약간 넓게 퍼지며 원형을 이루며, 잔존 형태로 보아 반지하식 구조이다.
가마터 동쪽 주변에 폐기장이 위치한다. 아궁이는 소성부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며, 평면 형태가 원형이다. 조사 결과 아궁이는 세 차례의 증축이 이루어졌다. 연도부는 제2초벌구이 칸의 북쪽 끝부분에서 확인되었고, 2회에 걸쳐 설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차 배연구는 요체의 동쪽에 치우쳐 1개소만 확인되었고, 2차 배연구는 요체의 동서 양쪽에서 확인되었다.
1차 배연구는 수직의 잔존 깊이가 35㎝이며, 아래에서 25°의 경사를 이루면서 위로 향하고, 경사를 이루는 부분의 단면은 ∪자 형이다. 소성부는 주축 방향이 N-110°-W이고, 규모는 길이 2,020~2,040㎝, 너비 180~200㎝로서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다. 잔존 깊이는 아궁이 쪽이 63㎝, 제1보조 출입구 쪽이 80㎝이고, 연도부로 가면서 점차 깊이가 얕아져 재벌구이 구간과 초벌구이 구간의 경계부의 깊이는 17㎝이며, 연도부 가까이의 깊이는 21㎝이다.
소성부는 재벌구이 구간, 초벌구이 구간, 측면 출입구로 이루어졌고, 소성부의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3회의 요체 벽이 확인되어 두 차례의 개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2·3차 요체의 벽은 점토를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바닥은 요체를 조성할 때 굴착한 생토 바닥면을 이용하였고, 열을 받아 피열되어 소토로 되었다. 바닥 각도는 아궁이 쪽은 16°이고, 재벌구이 구간의 끝 부위는 10°로 아궁이에서 연도부로 향하면서 바닥 각도가 약화된다. 재벌구이 구간의 바닥은 거의 수평을 이룬다. 초벌구이 구간은 길이가 507㎝이고, 초벌구이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225㎝ 거리에 단을 만들어 별도의 초벌구이 구간을 만들었다. 따라서 초벌구이 구간은 제1칸과 제2칸의 2개 칸으로 이루어졌다. 제1초벌구이 칸의 길이는 225㎝이고, 제2초벌구이 칸의 길이는 282㎝이다. 초벌구이 구간의 바닥은 모두 3개 층이 확인되었는데, 두 차례의 보수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요체의 벽은 지면을 파고 설치한 부분과 판축을 한 후 설치한 부분으로 구분된다. 소성부 시작 지점에서 6번째 보조 출입구에 인접한 동쪽 면은 판축을 하였고, 6번째 측면 출입구에서 연도부까지의 동쪽 면은 지면을 파고 벽체를 구축하였다. 서쪽 부분의 벽체도 지면을 파고 구축하였다. 따라서 경사가 심한 동쪽 일부분은 구지표면을 정지한 후 판축을 하여 요체를 구축하고, 그 이외 부분은 지면을 파서 요체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폐기장은 소성부의 동쪽 자연 경사면에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소성부의 중간 부위[제6측면 출입구]에서 시작하여 아궁이까지 걸친다. 폐기장의 규모는 동서 770㎝, 남북 157㎝, 깊이 185㎝이다. 폐기층은 모두 12층으로 구분되었는데, 각각의 층은 위에서 아래로 연속되지 않고,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폐기 행위가 폐기장 전면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폐기층 중 가장 두께가 두꺼운 층은 8층으로, 가장 두꺼운 곳의 두께가 68㎝이다. 폐기층의 두께는 폐기한 양과 비례하며, 그것은 실패한 제품의 양과도 비례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께가 두꺼울수록 폐기량이 많고, 실패율도 그만큼 높았음을 나타낸다.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있는 하장안 유적 분청사기 가마터에서는 모두 4기의 자기 가마가 확인되었고, 5호 가마를 통해 가마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 수 있다. 5호 가마에서는 회구부·아궁이·소성부·연도부가 확인되었다. 전체 길이는 약 23.8m이고,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에 가까우며 화구부에서 약간 넓게 퍼진다. 요체의 구조는 지상식이며, 요체의 양쪽으로 폐기장이 있다. 소성부는 지표상에 점토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벽체편이 노출되어 있으며,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다.
규모는 잔존 길이 17.6m, 너비 1.7m, 깊이 53㎝이며, 소성실 내부는 회청색과 적색의 얇은 모래가 여러 층으로 두텁게 깔려 있다. 출입구는 소나무 등으로 인한 훼손으로 정확한 상태를 알기 어려우나 요체의 오른쪽에 6개가 있다. 소성실의 벽체 바깥은 좌우의 바닥면을 정지한 후, 벽체를 구축하고 벽체를 보호하기 위해 외측에 점질토를 채워 넣고, 그 외측은 판축을 하였다. 아궁이 입구는 할석을 30~40㎝ 크기의 화강암으로 적석하였다. 회구부는- 아래로 넓게 퍼지며 길이 6m, 최대 너비 3.7m, 깊이 45㎝이다.
폐기장은 소성부의 좌우에서 모두 확인되었다. 폐기장의 규모는 동서 길이 5m, 남북 길이 15m, 깊이 80㎝이다. 조사 결과 퇴적층의 양상은 경사면을 따라 위쪽인 서쪽에서 아래쪽인 동쪽으로 퇴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적층은 크게 2개 층으로, 자기편이 많은 흑갈색 부식 사질 토층과 소토가 많이 있는 적갈색 사질 점토층으로 구분된다. 유물은 분청사기·백자 초벌구이편, 도침(陶枕)이 확인되었다. 기종은 대다수가 반상용이나 일부 호류도 포함되어 있다.
5. 기와 가마터
기와 가마는 건물의 천장 부재인 기와를 굽기 위해 만든 시설물을 지칭하며, 기와가 사용되기 시작한 삼국 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일반적인 기와 가마는 불을 지피는 아궁이, 말린 기와를 굽기 위해 놓는 소성실, 연기와 열이 나가는 굴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부산 지역에서도 기와 가마는 여러 곳에서 상당수 조사되었다. 부산 지역의 기와 가마터는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임석 유적에서 2기, 기장군 기장읍 삼성리 아시안 게임 경기장 부지에서 3기, 삼성리 기와 가마터에서 7기, 기장군 철마면에 있는 고촌리 유적에서 6기 등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기와 가마는 모두 18기이고, 대부분 기장군 관내에 분포한다. 조사된 18기의 가마 중 통일 신라 시대의 것은 고촌리 유적에서 2기가 확인되었고, 이외의 가마는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