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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691
한자 美音洞-
영어의미역 Kiln Site of Mieum-dong
이칭/별칭 미음동 도요지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619-2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종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가마터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0년 3월~10월연표보기 -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619-2
출토 유물 소장처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96-20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의 가마터.

[변천]

미음동 가마터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까지 청자를 비롯한 도기와 기와를 생산하였던 곳이다. 가마터는 조선 초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고, 이후 이곳에는 조선 시대의 분묘가 조성되어 12기의 분묘가 함께 발굴되었다.

[위치]

미음동 가마터는 풍산산[252m]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말단부로 14~29m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2년 부산시와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실시한 녹산 문화 유적 학술 조사에서 도침, 소토, 청자발, 청자 접시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였을 때부터 가마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2007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지표 조사에서 다수의 유물이 수습되어 동일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본격적인 시굴 조사는 복천박물관과 경남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하였는데, 시굴 조사 결과 가마 3기와 폐기장을 확인하였고, 고려 시대의 청자를 다수 수습하여 발굴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가마 6기와 폐기장 6개소, 수혈 12기, 소성 유구 1기, 수혈군 2개소, 조선 시대의 분묘 12기를 확인하여 보고하였다.

1호 가마는 남동쪽 구릉 사면의 19.3m 선상에 입지하고 있고, 폐기장은 1호 가마 동쪽 경사면을 따라 위치하는데, 내부에서 도기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도기 가마였을 가능성이 높다. 주로 대형의 도기편이 출토되었는데, 1호 가마는 실생활에 필요한 대형 기종의 도기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2호 가마는 남서쪽 구릉 사면의 약 26m 선상에 있고, 폐기장은 연소실 양측에 형성되어 있는데, 수혈에서 청자발, 청자완(靑磁碗), 청자 접시, 반구 장경병(盤口長頸甁), 장구편, 대반(大盤)[큰 소반이나 목판], 도침(陶枕)[자기로 만든 베개] 등이 다양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청자 가마로 추정된다. 가마는 벽체가 높은 열로 인해 유리질화되었는데, 붉게 산화 소결된 면이 네 차례 정도 교대로 나타나고 있어 최소 4회의 개·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유추된다. 3·4·5호의 가마와 폐기장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들도 청자 가마로 추정된다.

6호 가마는 남서쪽 구릉 사면의 9.5~11.5m 선상에 입지하고 있다. 6호 가마는 지하식 등요(登窯)[토기 및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하나로, 고온을 낼 수 있도록 산등성이 비탈면에 터널 모양으로 길게 만듦]로, 연소실에서 연도부까지 모두 잔존하고 있다. 소성실 내부에서 목탄이 출토되었고, 청자 가마와 소성 상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점과 유구 내부에서 기와가 다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기와 가마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음동 가마터는 도기 가마터와 기와 가마터도 있지만, 주로 청자 가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현황]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산업 단지 내에 포함되어 지금은 미음동 가마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의의와 평가]

12세기 전반 이후 청자가 강진에서 각 지역으로 확산되는 시기에 미음동 가마터는 부산의 대표적 청자 유적지로 의미가 있다. 미음동에서 생산된 청자는 주로 인근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 공급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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