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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023
한자 六-十朴鍾哲君拷問殺人隱閉糾彈-護憲撤廢國民大會
영어의미역 June 10 Citizens' Assembly for Denouncing the Concealing the Details of Torturing and Murdering Bak Jongcheol and for Protest against the Government's Attempts to Protect the Constitu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광복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 운동
관련인물/단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7년 6월 10일연표보기 - 개최
종결 시기/일시 1987년 6월 29일 - 대통령 직선제 수용
발단 시기/일시 1987년 1월 13일연표보기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87년 2월 7일연표보기 - 2·7 추도 대회
전개 시기/일시 1987년 3월 3일연표보기 - 3·3 평화 대행진
발생|시작 장소 대각사 주변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발생|시작 장소 대각사 주변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정의]

1987년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6월 민주 항쟁의 시발점이 된 집회.

[역사적 배경]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의 대통령 간선제 헌법 고수 발표에 이어, 박종철(朴鐘哲) 사건의 진상이 은폐 축소되었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에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이 분노는 독재 정권을 타도하지 않고는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는 폭넓은 공감대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학내 민주화 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 등 대학가의 민주 열망도 높아져 갔다.

[경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가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한 6월 10일 오후 6시, 대회가 예정된 부산직할시 중구 대청동대각사는 경찰의 철통같은 경비 속에 싸여 있었다. 대각사 집회가 원천 봉쇄되었음을 확인한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부산직할시 서구 토성동 부산의대[대학병원]에 집결하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경찰은 병원 안쪽으로까지 최루탄, 다연발탄[일명 지랄탄]을 난사하여 환자에까지 피해를 입혔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차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부산직할시 중구 광복동 로얄 호텔 앞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자갈치 시장 쪽으로 밀려난 뒤에도 시위대를 형성해서 대열을 이루었다. 경찰은 이날 시위대와 시민들의 연대를 막기 위해 처음부터 최루 가스를 무차별 살포했을 뿐만 아니라, 최루탄을 발사할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 수칙마저 무시하였다. 이 때문에 이날 대부분의 부상자는 구경하던 시민들 중에서 파편이나 직격탄을 입은 경우였다. 그러나 경찰의 이런 초기 과잉 진압은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가증시켰고, 투쟁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오후 8시경 시위대는 부영 극장 앞에 모여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는데, 이때쯤에는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동광초등학교 인근에서 경찰 1개 중대가 시민들에게 포위되어 무장 해제를 당할 정도였다. 이날 시위대는 특정 장소에서 거대한 군중을 형성하는 대신에, 시내 각처로 흩어져 동시 다발적인 형태로 시위를 벌였다. 이는 1979년 부마 민주 항쟁 때 이미 그 위력이 확인된 바 있었다. 이런 형태의 시위 형태는 경찰의 작전망을 흩트려 놓았다.

이날 대대적인 투쟁을 통해 그 위력이 재확인된 시위 방식은 이후 이어지는 가두투쟁에서 계속 응용 발전되었다. 이렇게 하여 시위는 자정을 넘겼고, 시민과 학생들 중의 일부는 부산직할시 중구 보수동 중부교회에 모여 철야 농성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명동성당의 농성 소식을 전해 듣고 이튿날 아침 해산하였다.

[결과]

6월 10일 시위에서 총 170명이 연행되어, 12일 8명은 구속되고 43명은 즉심에 회부되었다. 나머지는 훈방되었다. 이날 이후 시위는 부산 시내 거의 전역에서 일상화되었고, 6·29 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벌어졌다.

[의의와 평가]

6·10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는 6월 민주 항쟁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었지만, 이날의 성공적 시위 이후 6월 내내 대대적인 시위가 이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부산 시민들의 가열 찬 투쟁은 단연 돋보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계속적으로 시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16일부터 6박 7일 동안 계속된 가톨릭 센터 농성 사건과 18일 오후 서면부터 부산직할시 동구 범일동까지의 대로를 가득 메운 엄청난 군중은 사그라지려 하던 6월 민주 항쟁의 불길을 더 힘차게 되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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