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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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三平和大行進 |
영어의미역 | March 3 Peace Parade |
이칭/별칭 |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호석 |
[정의]
1987년 3월 3일 박종철(朴鐘哲)의 49재일에 개최된 평화 대행진.
[역사적 배경]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철권통치와 온갖 비리에 신물이 나 있던 국민들에게 부천서 성고문 사건, 김근태(金槿泰) 고문 사건 등의 공권력에 의한 비인도적 폭력 사건들은 큰 충격을 주었고, 급기야 1987년 벽두에 터진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사건에 이르러 그 분노와 충격이 2월 7일의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분출되고 말았다.
[경과]
2·7 추도 대회로 자신감을 얻은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위원회’는 박종철의 49재를 ‘고문 추방 민주화 국민 평화 대행진’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가족을 중심으로 치르는 49재는 부산직할시 사하구 괴정동의 사리암에서 갖기로 하고, 추도위원회의 ‘평화 대행진’은 2·7 추도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대각사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추도위원회는 2월 7일부터 3월 3일까지를 ‘고문 추방 민주화 국민 결의 기간’으로 선포하고 3·3 평화 대행진을 준비하였다.
2·7 추도 대회 진압에 실패한 부산시경은 사흘 전부터 내린 갑호 비상령에 따라 도심지마다 겹겹이 저지선을 펼쳤고, 전날부터 최성묵, 김기수 목사 등 재야인사 50명을 가택 연금한 가운데 사리암과 대각사 주변에 경찰 병력 2,000여 명을 배치하였다. 3월 3일 오전 부산직할시 사하구 괴정3동 사리암에서는 박종철의 49재가 박 열사의 가족 친지와 불교계 인사, 작가 김정한 등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통 불교 의식에 따라 열렸다.
이날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등에서는 총학생회 주최로 교내에서 각각 추도 집회를 갖고 시내로 집결, 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6시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단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소속 재야인사와 신민당 당원 200여 명이 부산직할시 중구 광복동 동양 관광 호텔 앞에 나타났다. 이들이 로얄 호텔 앞까지 200m 가량 침묵 행진을 벌이고 있을 때 경찰이 달려들어 ‘퍼내기’ 작전에 들어갔다.
퍼내기 작전이란 시위자들을 연행해 한 두 시간 이내에는 도심으로 돌아올 수 없는 시 외곽의 외딴 곳에 내팽개치는 것을 말한다. 시위의 주동자들이지만 잡아봤자 구속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퍼내기’의 대상이었다. 경찰이 정한 주요 퍼내기 대상은 야당 국회 의원들과 민주화 투쟁이라면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이날 경찰은 이들을 닭장차에 태운 뒤 시 외곽인 송정 등지로 퍼내었다.
국회 의원들이 실려 간 15분쯤 뒤 미화당 부근에 모여 있던 대학생 수백 명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시도하였다. 시위대는 시민들을 규합하여 부산직할시 중구 남포동으로 진출했으나 강력한 경찰의 저지로 다방 골목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다시 6시 30분경 학생들은 ‘고문 타도를 위하여’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부산직할시 서구 충무동 로터리에 재집결하여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은 사과탄을 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35명을 연행함으로써 7시경 도심의 산발적인 시위는 끝났다. 이날 대각사 주변과 남포동, 충무동, 사상 등지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는데 경찰이 밝힌 시위자는 신민당원, 대학생, 재야 관계자 등 모두 500여 명이었다. ‘부산추도위’가 잠정 집계한 시위 참여자는 3,000명가량이었다.
[결과]
부산시경은 이날 3·3 평화 대행진과 관련하여 학생과 시민 120명을 연행하였다. 이 가운데 부산대학교 학생 양창석 군 등 적극 가담자 3명은 구속하고, 15명은 즉심, 나머지 112명은 훈방 조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찰의 대응이 훨씬 강화되었기 때문에 2·7 추도 대회에 비해서 3·3 평화 대행진의 시위 규모는 줄었으나, 5공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2·7 추도 대회와 함께 3·3 평화 대행진은 박종철 사망 사건이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