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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473
한자 金容泰
영어음역 Gim Yongta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수영 야류」 기능 보유자
성별
대표경력 「수영 야류」 말뚝이 역 기·예능 보유자
출생 시기/일시 1922년 8월 13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76년 6월 18일연표보기 - 「수영 야류」 말뚝이 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
몰년 시기/일시 1995년 3월 28일연표보기 - 사망
거주|이주지 김용태 거주지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506-6
활동지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29-1지도보기
활동지 수영 민속 예술 전수관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29-1지도보기

[정의]

현대 부산 「수영 야류」의 말뚝이 역 기·예능 보유자.

[활동 사항]

김용태(金容泰)[1922~1995]는 1922년 8월 13일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알 수 없다. 김용태「수영 야류」[수영 들놀음]의 공연에 참가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였는데, 이때 「수영 야류」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가락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에서 성행하던 민속 가면극으로, 이 가운데 「수영 야류」「동래 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었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밀어닥친 외래 사조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수영 야류」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방 이후 「수영 야류」의 재현과 복원을 주도한 이들은 최한복(崔漢福)[1885~1968], 조두영(趙斗榮)[1892~1964], 태명준(太命俊)[1906~1979], 조재준(趙在俊)[1906~1974] 등을 중심으로 한 수영의 토박이들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63년 양반 과장, 영노 과장, 할미·영감 과장, 사자무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 야류」 4개 과장의 대사와 탈 및 연기 등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김용태「수영 야류」의 말뚝이[또는 막득이] 등으로 참여하였다. 말뚝이는 파리하고 나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인 양반과는 대조적으로 완력이 세고 정력이 강한 젊은이로 형상화되어, 양반의 이면(裏面)을 폭로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반층의 무능과 허세를 조롱하는 배역이다. 마지막 대사에서 수양반의 대부인 마누라와 간통하였음을 폭로하는 것처럼, 조선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연극적으로 녹여내는 역이다. 따라서 말뚝이 역은 양반 역과 함께 「수영 야류」 놀이꾼 중 재담과 춤의 기량이 아주 뛰어나야 맡을 수 있었다.

1971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가 창립되고, 1972년 「수영 야류」의 중요 무형문화재 제43호 지정과 더불어 1974년 수영 민속 예술 전수관이 준공되면서 「수영 야류」를 비롯한 수영의 민속 예술은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각종 공연이 더욱 활발하게 개최되었는데, 김용태는 이 과정에서 「수영 야류」의 보존과 전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김용태「수영 야류」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조재준에 이어 말뚝이 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95년 3월 28일 김용태는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6년 6월 18일 「수영 야류」 말뚝이 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 『수영 전통 예능』(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1993)
  •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http://www.suyeongmins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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