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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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Dolmen |
이칭/별칭 | 지석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배진성 |
[정의]
부산 지역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
[개설]
1964년에 사하구 감천동에서 도로 공사로 인해 고인돌 6기가 발견되었고, 미음동 분절 고인돌에서도 3~4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장군에서도 지표 조사를 통해 신리와 덕선리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장전동 고인돌은 1935년, 대신동 고인돌은 1934년에 알려졌다. 당시 서구 대신동 77번지에서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주위에는 고인돌 상석(上石)처럼 큰 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현재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가 자리하고 있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인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사직동 고인돌과 괴정2동 유적, 임석 유적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에서는 상석 없이 지하의 무덤방만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 지하에 매장 시설만 있는 돌널무덤으로 보는 의견과 발견 당시는 소멸되고 없었지만 원래는 상석이 있었던 고인돌로 보는 의견이 있다.
[고인돌의 분류]
한반도의 고인돌은 형태 및 구조에 따라 탁자식(卓子式), 바둑판식[기반식(基盤式)], 개석식(蓋石式), 위석식(圍石式) 등 4종류로 분류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구획묘(區劃墓)가 확인되면서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지상(地上)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크고 편평한 돌을 얹어 놓은 것으로, 중부 및 북부 지역에 많아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마치 바위처럼 보이기도 하는 커다란 상석, 그것을 받치고 있는 고임돌과 그 아래의 무덤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중부 및 남부 지역에 많아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의 무덤방 위에 뚜껑처럼 보이는 덮개돌이 놓인 것이며, 위석식 고인돌은 상석 혹은 덮개돌 아래에 자연석이나 판석(板石)을 돌려 무덤방을 만든 것이다. 구획묘는 무덤방 위의 상석 주위에 돌을 깔아 일정한 구역, 즉 묘역(墓域)을 함께 만든 형태이다.
[고인돌의 형태 및 특징]
감천동 고인돌은 상석 아래 고임돌이 있어 바둑판식에 해당하며, 1호와 5호에서는 간 돌칼[마제석검(磨製石劍)]이 출토되었다. 대신동 유적의 고인돌은 구조를 알 수 없으며, 장전동 고인돌은 상석이 마치 뚜껑돌처럼 편평하였다고 하며, 그 아래의 무덤방에서는 간 돌칼과 돌로 만든 칼 손잡이 끝 장식[석제 검파 두식(石製劍把頭飾)]이 출토되었다. 미음동 분절 고인돌은 분절 마을 저수지 옆의 정자나무 아래에 상석에서 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을 감안하면 원래 고인돌의 상석은 길이 2~4m, 두께 40~60㎝ 정도로 추정되며, 바둑판식이나 개석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칠리 신리 고인돌은 상석의 윗부분만 지상에 노출된 상태여서 고인돌의 종류는 알 수 없으며, 2기가 동서 방향으로 약 2.5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덕선리 고인돌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며 주변에서 유물은 채집되지 않았지만, 상석의 모양이나 그것을 받치고 있는 3개의 고임돌로 보아 고인돌로 추정되고 있다. 가덕도 두문 고인돌은 바둑판식일 가능성이 높으며, 상석의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50㎝, 두께 60㎝ 정도이며 장축(長軸)은 남북 방향이다.
[의의와 평가]
부산 지역의 고인돌은 도시화로 인해 대부분이 소멸된 상태이며, 선사 유적에 대한 조사도 미진하여 지역적 특징이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성과로 보면 부산 지역 고인돌의 종류는 바둑판식이 많은 반면, 한반도 중부 및 북부 지역에 많은 탁자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감천동 고인돌과 가덕도 두문 고인돌은 해안가에 인접하고 있어 다른 고인돌과는 입지에서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부산 지역 고인돌의 시기는 대부분 청동기 시대 후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