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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일본 열도와의 교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22
한자 朝鮮時代日本列島-交流
영어의미역 Exchanges of the Joseon Dynasty witht the Japanese Archipelag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철

[정의]

조선 시대에 동래의 왜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과의 교류.

[개설]

조선 시대에 동래 지역에서의 일본과의 교류는 왜관(倭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지금의 진해[당시 웅천]에 위치한 제포[내이포] 왜관이 부산포 왜관보다 비중이 컸다. 그리고 상경한 일본 사절은 동평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사량진 왜변 이후 폐쇄된 삼포 왜관은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 체결로 부산포 왜관만 존속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동평관도 폐쇄되면서 동래에만 왜관이 존재하게 되었다. 일본 사절의 서울 왕래가 금지되면서 동래가 일본과의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왜관에서는 외교, 무역, 문화, 생활, 풍속, 기술 등 다양한 방면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외교]

일본의 외교 사절은 연례 송사와 차왜(差倭)다. 1622년(광해군 4)을 끝으로 일본 국왕사는 단절되고, 모든 사절 파견은 대마도(對馬島)가 주관하였다. 해마다 8척만이 조선에서 외교 의례 접대를 받았는데, 이들을 연례 송사[연례 팔송사]라 한다. 차왜는 정기 사절인 연례 송사와 달리 현안이 있을 때 파견하는 사절이다. 동래 지역에서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것은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였다. 동래 부사는 일본 사절 접대, 왜정(倭情) 보고, 대일 무역 감독과 회계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부산 첨사는 왜관 출입 통제, 일본 선박 출입 감독, 왜관 도차사원(都差使員) 임무 등의 일을 하였다. 실무는 왜학 역관과 소통사가 주로 담당하였다.

[무역]

무역은 공무역, 개시 무역[사무역], 밀무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공무역을 통해 일본산 구리와 납, 동남아시아산 물소 뿔[수우각(水牛角)]·단목[소목]·명반·후추[호초] 및 조선산 목면·쌀 등이 거래되었다. 개시 무역을 통해서는 일본산 은·구리 등과 중국산 비단실[생사·백사]·비단, 조선산 인삼·소가죽[우피]·마른 해삼[건해삼]·황금(黃芩) 등이 교류되었다. 이들 무역 외에 일본은 구청(求請)·구무라는 형태로 서적, 약재, 동물, 모피, 다기와 제기, 문방구, 직물, 어패(魚貝), 과일 등 각종 물품과 그림, 의복, 건물 등은 물론 목수, 의원, 화원, 나전장, 유기장 등의 파견도 요구하였다. 이 외에도 왜관의 수문[정문] 밖에서 열린 조시[아침 시장]에서는 쌀·생선·채소·과일 등 일본인이 먹는 각종 생필품이 교류되었다.

[문화]

접위관 등 왜관 직임자나 문인의 필담창화(筆談唱和) 등 문학적 교류는 왜관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8세기 필담창화를 주도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1729년(영조 5) 재판 차왜로 초량 왜관에 와서 조선 문인들과 시문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학규(李學逵)는 1811년(순조 11) 통신사를 전송하기 위해 왜관에 왔다가 보고 느낀 것을 지은 「초량왜관사(草梁倭館詞)」 20수를 남겼다. 또 대마도 사람 가운데는 이학규에게 화운(和韻)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초량 왜관의 동향사에서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서승왜(書僧倭)는 조선 승려와 필담창화를 하는 등 교류를 하였다. 학문적 소양을 갖춘 동향사 승려가 문화 교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왜관을 통해 그림이 교류되었다. 막부의 요청으로 김명국(金明國), 함제건(咸悌健)의 그림이 수출되기도 하였다. 호랑이 그림은 매 그림과 함께 1800년을 전후하여 구무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신윤복(申潤福), 이수민 등 유명 화가의 그림도 있으나 무명 화가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송호도(松虎圖)가 대종을 이루었다. 무명 화가의 그림이 일본에 상당수 간 이유는 일본인들의 조선화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동래 지역에는 왜관의 구무품 수요를 위해 제작·활동하는 일군의 화가들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희룡(趙熙龍)이 1844년 찬술한 『호산외기(壺山外記)』에는 일본인이 왜관에서 이재관(李在寬)의 영모화(翎毛畵)[새와 동물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를 해마다 구입한다고 하였다. 이 정도로 그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생활]

왜관이 오랜 기간 부산에 있으면서 양국인의 교류가 빈번하여 일본의 생활·풍속·문화가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19세기 전반 김해 지역에는 일본산 물품들을 사용하는 부호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도를 차고, 일본산 미농지(美濃紙)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일본 음식과 도박도 널리 퍼졌다. 이러한 일본풍은 왜관 주변의 초량이나 동래 지역이 더 강하였을 것이다.

업무를 위해 조선인 관리가 왜관에 들어갔을 때 일본 측은 일본 음식을 접대하였다. 조선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요리는 스기야키[杉燒]였다. 반면 조선의 생활·문화·풍속이 왜관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다. 동래 부사, 부산 첨사, 역관은 명절이 되면 일본 관리에게 음식과 각종 기념품을 선물하였다. 연향 대청의 접대는 조선의 음식을 일본인에게 선보이는 기회였다.

이처럼 왜관은 양국의 외교, 경제, 문화, 생활이 교류하는 장소였다. 양국 간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문화 교류는 더욱 심화되었다. 왜관은 통제 공간으로 출발하였지만, 실제는 두 나라의 사람·물품·문화·정보 등이 교차하고 교류하는 열린 공간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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