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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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致德 |
영어음역 | Wang Chideok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460번길 21[좌천동 31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의사.
[활동 사항]
왕치덕(王致德)은 1896년[혹은 1898년] 부산광역시 사상구[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주덕리 749번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동구 범일동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범일동은 부산진에 위치한 대표적인 조선인 마을로서, 일본인 거주 구역이 팽창하면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범일동 일대에 거주하던 조선인 청년들은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훗날 박재혁(朴載赫)을 필두로 의열단 관련 인물들을 대거 배출하였다.
왕치덕은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3회로 입학하였으며 이후 1914년 봄, 부산공립상업학교 동창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 조직 구세단에 가입하였다. 구세단은 이후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재혁·오택(吳澤)·최천택(崔天澤) 외에도 박흥규·김병태(金餠泰)·김인태·김영주(金永柱)·장지형·조영상 등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독립 사상이 투철한 청년을 모으고 연결하려는 데 주목적을 두었다.
이후 구세단은 밀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원봉(金元鳳)과도 연결을 가졌는데, 왕치덕 역시 1914년에 김인태·오택 등과 함께 김원봉을 만나기 위해 밀양으로 갔지만 만나지 못한 일화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단은 설립된 지 반 년이 못 되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왕치덕은 다른 구세단 단원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구세단원들은 구세단을 해체한다는 조건으로 방면되었다.
그 후 구세단원들 대부분은 의열단의 투쟁에 참여하거나 부산 지역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왕치덕도 1920년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나 박재혁의 단독 행동으로 일단락되어 풀려났다. 이후 1927년 대구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 시험에 합격한 후 1931년 5월부터 좌천정에 일광의원(日光醫院)을 개원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이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갖고 부산으로 오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오택·김인태 등과 함께 김원봉과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