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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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市大廳 |
영어의미역 | Office in Charge of Trad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2가 7|8|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왜관에 설치된 조선과 일본 상인들의 무역 장소.
[개설]
조선 전기 일본과의 무역은 삼포 왜관(三浦倭館)과 서울 동평관(東平館), 삼포에서 서울로 가는 경로에 있는 일본 사절의 숙박지 주변에서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에 일본인의 상경(上京)이 금지되자 일본과의 무역은 모두 부산의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사무역(私貿易)[개시 무역(開市貿易)], 밀무역(密貿易)으로 구분된다. 사무역, 즉 개시 무역이 이루어지던 건물이 개시 대청(開市大廳)이었다.
[개시 무역과 개시 대청]
개시 무역은 장소나 규모에 따라 개시(開市), 대청 개시(大廳開市), 대개시(大開市) 등으로 불렸다. 개시에 참여한 무역 상인은 동래 상인(東萊商人)이라고 불리는 특권상인(特權商人)이었다. 개시는 종래에는 한 달에 3회 열렸으나, 1610년(광해군 2)에 한 달에 6회[3일과 8일]로 늘어났다. 또한 일본인의 요청이 있거나 무역품이 많이 적체되었을 때는 별도로 개시가 열리기도 하였다.
왜관 내에서 양국 상인들끼리 사사로이 무역을 하면 수세량(收稅量)을 파악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무역이 금지된 금수품(禁輸品) 거래에 대한 통제, 불법 정보 유출이 우려되므로 양국의 무역 담당관, 수세관, 통역관, 상인 등이 정해진 곳에 모여 공개적으로 무역을 진행하기 위해 별도의 무역 공간을 왜관 안에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개시 무역이 진행된 곳은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개시 조항에 “훈도와 별차가 개시 대청에 들어가 앉으면, 여러 상인들이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한 연후에 각기 그 물건을 차례로 교역하며 마음껏 흥정하고 일시에 모두 물러난다”라고 하여 무역 장소가 개시 대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춘관지(春官志)』 시역 사적(市易事蹟) 조항에 “왜관 대청에서 개시하되, 훈도와 별차 및 호조 수세 산원과 본부[동래부] 개시 감관 등이 대관왜(代官倭)와 동서에 벌여 앉아 뜰 가운데 물화(物貨)를 나누어 두고 피차 교역할 물품에 대해 각각 물목[都目]을 작성하여, 점검할 기반으로 삼도록 한다”라고 하여 무역 관계자들이 모두 대청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개시 대청은 왜관 동관(東館) 관수왜가(館守倭家), 재판왜가(裁判倭家)와 함께 동관 3대청(三大廳)으로 불리며 관수왜가 다음으로 왜관에서 큰 건물이었다. 본채 40칸, 중문(中門) 1칸, 변소 1칸을 갖추었고, 왜관에서 조선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일본인 관리 일대관의 집무소인 일대관가(一代官家)와 붙어 있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개시 대청과 일대관가를 합쳐 60칸 규모라고 쓰여 있다.
[왜관과 개시 대청]
1. 절영도 왜관
절영도 왜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교(國交) 재개를 요청하러 오는 일본 사절의 숙소로 급히 조성된 왜관이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건물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 일본 사절이 늘 불만을 제기하였다. 국교 재개보다 앞서 1603년(선조 36) 왜관에서의 개시를 승인하였지만, 이것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양국 상인의 거래를 인정하면서 밀무역을 방지하려는 의미가 강하였다.
또한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사절을 육지가 아닌 절영도에 가두어 둔다는 일본 측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목적도 있었고, 긴급한 군수 물자를 확보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아직 국교가 정식으로 재개되지 못한 상태이고 사절 숙소도 미비하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영도 왜관에는 전용 무역 공간인 개시 대청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두모포 왜관
두모포 왜관의 경우에도 개시 대청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53년(효종 4) 금산입각방 약조(禁散入各房約條)에는 두모포 왜관 때의 개시 날이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개시 날에는 군관 2명은 외문(外門), 동래 감시 군관(監市軍官), 호조 계사(計士), 동래 담당 아전 등은 모두 외대청(外大廳)의 문, 부장(部將) 6명은 중대청(中大廳) 내문(內門)을 지킨다. 훈도와 별차는 소통사(小通事)를 거느리고 왜관 안에 들어가 일본인이 대청으로 나오면 같이 그곳에 있고, 중대청에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 잠상(潛商)과 일본인의 각방으로 흩어져 들어가는 자를 방지한다.”
“대청 개시(大廳開市) 이후에 혹시 수량 파악과 가격 흥정에 미진한 것이 있으면, 상인에게 다시 중대청에 들어가 사정을 다 논의하여 정하되……”라고 되어 있다. 개시 일에 관리와 상인들이 대청에는 들어가지만, 개시 대청이라고 명명된 건물은 아니고 외대청과 중대청에서 개시 무역을 하였다.
『변례 집요(邊例集要)』에는 “이른바 개시 대청은 비록 옛 제도에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대청에서 개시하는 일이 없으므로 본래 긴절(緊切)한 것이 아닌데도, 앞 동래 부사[어진익(魚震翼)] 때 관례에 따라 조급(造給)하는 뜻을 이미 약속하였다고 한다. 지금 그들[일본]에게 신의를 잃을 수 없으니, 옛 제도와 비교하여 그 칸 수를 줄여 간편함에 따라 만들어 준다”라고 되어 있다.
개시 대청이 옛 제도에는 있었으므로 초량 왜관에서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 규모를 줄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1676년(숙종 2) 기록으로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왜관 이전이 결정된 이후의 것이다. 따라서 두모포 왜관에는 중대청·외대청, 즉 개시 대청의 기능을 한 건물이 있었으므로 옛 전례에 따라 개시 대청을 초량 왜관에도 세워야 하며 또 세우기로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두모포 왜관과 관련한 건물 명칭이나 여러 기록에는 개시 대청이라고 명명된 건물은 없었으나 개시 무역이 진행된 특정 건물은 있었다고 여겨진다.
3. 초량 왜관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옮긴 새 왜관, 즉 초량 왜관에는 개시 대청이란 건물이 있었다. 변박(卞璞)의 「왜관도(倭館圖)」[1783]에 관수왜가와 수문(守門) 사이에 길게 그려진 개시 대청을 찾을 수 있다. 각종 기록에도 개시 대청에서의 개시 모습, 개시 대청의 경관 및 규모가 잘 나타나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9년(광해군 1)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양국 외교도 점차 안정되어 나갔다. 점차 양국 사이의 무역이 증가되고 무역 전담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두모포 왜관 때는 외대청과 중대청이 개시 대청의 기능을 담당하다가, 초량 왜관 때는 왜관 조성 때부터 무역 전담 단독 건물로 개시 대청을 세웠다. 개시 대청은 초량 왜관 안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었으며, 조선 측에서 조선식으로 세운 건물이었다.
개시가 열리는 날에는 일본과의 무역을 담당하는 동래 상인들이 개시 대청에서 일본 측과 무역 협상을 진행한 공간이면서, 조선 상인이 합법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왜관 내의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개시 대청에서 내려다보이는 뜰에는 무역 상인이 아닌 잡화를 거래하는 조선의 소상인(小商人)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파는 모습이 나타난다. 개시 대청과 그 주변 공간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무역과 상업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