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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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斗錫 |
영어음역 | Bak Duseok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교수·연극인.
[가계]
아버지는 박재연(朴在淵)이고, 친아버지는 박재호(朴在鎬)이다. 사촌 형은 부산대학교 교수를 지낸 박인석이다.
[활동 사항]
박두석(朴斗錫)[1921년~?]은 경상남도 진양군 내동면 삼계리[현 진주시 내동면 삼계리]에서 태어났다. 1934년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중안초등학교]를 거쳐 1939년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경제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944년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중국에 파견되었다. 1945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진주에 직조 회사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병주(李炳注) 등과 극문학연구회를 만들어 연극 운동을 하고, 최형섭(崔亨燮)과 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문화 운동을 펼쳤다.
1948년 박두석은 회사의 문을 닫고 부산으로 이주하여 김정한(金廷漢)이 주도하여 펴낸 『문화 건설』에 자금을 지원하고 손중행(孫重行)이 발행하던 『문화 타임즈』에 기고도 하면서, 윤이상(尹伊桑), 김수돈(金洙敦), 정진업(鄭鎭業), 이주홍(李周洪) 등 부산의 예술인들과 교분을 맺었다. 6·25 전쟁 중에는 해군 정훈감실(政訓監室)에서 임시직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51년 진주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1954년 부산대학교 상과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한동안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강의를 겸했다. 1957년 『부산 일보』 상임 논설 위원과 주필을 맡았다. 1958년 3월 20일에는 『부산 일보』 문화 부장이자 영화 평론가인 허창(許彰)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부산영평]를 출범시켰다. 박두석이 초대 회장, 허창이 총무를 맡았고, 장갑상, 황용주(黃龍珠), 이주홍, 여수중, 김일구가 참여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두석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우선 김정한, 최종식과 함께 부산대학교에서 해직되었는데, 나중에도 복직하지 않았다. 1962년 『부산 일보』 이사 겸 편집 국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7월 부산일보사 사장 황용주가 사임하자 이사(理事)들도 함께 물러났다. 12월에 신임 사장인 박준규의 권유로 다시 편집 국장으로 복귀하였다. 이 무렵 박두석은 부산 연극계와 인연을 맺었다. 1964년 2월~1966년 9월 한국연극협회 제2대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964년 10월에는 제3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 부산지부장에 선임되었다.
박두석이 한국예총 부산지부장과 한국연극협회 부산지부장을 맡으면서 부산 연극계는 전성기를 맞았다. 박두석은 연극이 발전하려면 극단이 많아야 한다며 다극단(多劇團) 주의를 선언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부산에는 단기간에 여러 개의 극단이 탄생하였다. 1963년 12월 박두석이 창단한 부산극단은 김영송의 소극장69, 차재원의 계절극회, 설상영(薛相英)의 입체극장 등과 함께 1960년대 소극장 운동을 주도하면서 부산 연극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1968년 5월 박두석은 『부산 일보』를 떠나 대통령 경호 실장 박종규가 인수한 『경남 매일 신문』[현 『경남 신문』] 사장을 맡았고, 8월에는 경남방송[현 마산문화방송] 사장까지 겸하였다. 1975년 12월 『부산 일보』 논설 주간으로 옮겼으며, 1977년 한국예총 부산지부장에 선임되었다. 1980년 8월 『부산 일보』에서 휴직 형태로 해직되었으며, 1991년 한국예총 고문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박두석은 1950년대 초반 「동남풍」, 「김시민」, 「진양성」, 1956년 「새벽」, 1973년 「아! 동래성」 등의 희곡을 썼다. 저작은 「부산 예술 개관(연극)」[『전국 지역 문화의 현황』, 한국예총, 1982], 『부산의 예술 문화』[부산일보사, 199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