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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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貴秀 |
영어음역 | Gim Gwisu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현대 부산 「수영 야류」의 할미 역 기·예능 보유자.
[활동 사항]
김귀수(金貴秀)[1909~1977]는 1909년 11월 8일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확실하지 않다. 1925년 부산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내성초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상업실천학교[구 동주여자상업고등학교, 현 동주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생활하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부산으로 귀환하였다. 1950년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의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62년에는 수영동 농업협동조합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귀수는 최한복(崔漢福)[1885~1968]과 정시덕(鄭時德)[1894~1974]을 스승으로 하여, 그 아래서 10여 년간 「수영 야류」[「수영 들놀음」]를 익혔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가락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에서 성행하던 민속 가면극으로, 이 가운데 「수영 야류」는 「동래 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밀어닥친 외래 사조와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1935년 이후 「수영 야류」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방 이후 「수영 야류」의 재현과 복원을 주도한 이들은 김귀수의 스승이던 최한복과 조두영(趙斗榮)[1892~1964], 태명준(太命俊)[1906~1979] 등 수영 토박이들이었다. 또 한 명의 스승인 정시덕 또한 이러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63년 양반 과장, 영노 과장, 할미·영감 과장, 사자무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 야류」 4개 과장의 대사와 탈 및 연기 등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김귀수는 할미·영감 과장의 주인공인 할미 역을 전수하였다. 할미는 못나고 ‘허름한’ 모습을 지닌 전형적인 평민으로, 할미 역은 살기 위해 허덕이고 거칠 것 없이 돌아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행동 양상을 보여 주었다.
특히 할미·영감 과장은 할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할미의 가련한 신세를 보여 줌으로써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부당한 횡포를 고발하고, 희생자인 여성에게 눈물 어린 동정의 웃음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할미·영감 과장의 주제가 제시되었다. 1972년 「수영 야류」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면서 김귀수도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7년 11월 18일 김귀수는 향년 68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2년 2월 26일 「수영 야류」 할미 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1976년 제15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서 개인상[서울특별시장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