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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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時德 |
영어음역 | Jeong Sideok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현대 부산 「수영 야류」의 양반 역 기·예능 보유자.
[활동 사항]
정시덕(鄭時德)은 1894년 3월 17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동명학교에 입학하여 수료하였다. 정시덕은 자신보다 두 살 위인 조두영(趙斗榮)[1892~1964]에게서 「수영 야류」[「수영 들놀음」]를 배웠는데, 조두영은 훗날 「수영 야류」 말뚝이춤의 명인이 된 인물이다. 이후 조두영, 최한복(崔漢福)[1885~1968] 등과 더불어 60여 년 동안 「수영 야류」 공연에 참가하여 그 전승에 앞장섰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가락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의 민속 가면극으로, 「수영 야류」는 「동래 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었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밀어닥친 외래 사조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1935년 이후 「수영 야류」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수영 야류」의 재현은 8·15 광복 이후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수영 야류」의 재현과 복원을 주도한 이들이 조두영을 비롯하여 최한복, 태명준(太命俊)[1906~1979] 등 「수영 야류」의 명인들이었고, 정시덕 역시 여기에 참여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영 야류」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정시덕도 이에 참여하여 「수영 야류」의 부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63년 4개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 야류」 전 과장의 대사·탈·연기 등이 완성되었고, 1972년 「수영 야류」는 중요 무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이에 정시덕은 「수영 야류」의 놀이꾼 가운데 재담과 춤의 기량이 가장 뛰어난 이가 맡는 양반 역의 기·예능 보유자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래 「수영 야류」의 맥을 이어 왔던 조두영과 최한복이 사망한 당시에 정시덕은 최고령의 나이로 「수영 야류」의 기·예능 보유자가 된 것이다.
이 외에 정시덕은 후진을 양성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수영 야류」의 기·예능 보유자가 된 김귀수(金貴秀)[1909~1977] 같은 이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1974년 11월 17일 정시덕은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2년 2월 26일 「수영 야류」 양반 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1973년 제13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서 공로상[충청북도지사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