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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5927
한자 釜山公立普通學校
영어의미역 Busan Public Primary School
분야 문화·교육/교육,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초등 교육 기관|보통학교|공립 학교
설립자 박기종 외 4명
인가 시기/일시 1896년 2월 14일 - 사립부산개성학교 학부[현 교육부] 인가
개교 시기/일시 1896년 3월 1일연표보기 - 사립부산개성학교로 개교
개칭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사립부산개성학교에서 한국공립부산개성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07년 3월연표보기 - 한국공립부산개성학교에서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09년 4월 9일연표보기 -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에서 부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부산공립보통학교에서 부산봉래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부산봉래공립심상소학교에서 부산봉래국민학교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45년 9월 24일연표보기 - 부산봉래국민학교에서 봉래국민학교로 개칭[광복으로 재개교]
개칭 시기/일시 1996년 3월 1일연표보기 - 봉래국민학교에서 봉래초등학교로 개칭
최초 설립지 사립부산개성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있었던 공립 교육 기관.

[변천]

1896년(고종 33) 2월 14일에 사립부산개성학교로 인가를 받아, 그해 3월 1일에 개교하였다. 1897년(고종 34)에 한국공립부산개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06년(고종 43) 교육에 관한 법령 ‘보통학교, 고등학교, 사범 학교, 실업 학교령’을 제정하고, 같은 해 8월 27일에 발포하였다. 그 가운데 「보통학교령」은 종래의 소학교를 개정하여 보통학교라고 칭하고, 일본이 조선의 사정에 적응하기 위하여 조직을 간편하게 하고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였다. 우리 정부는 교육의 확장을 계획함과 동시에 실업 교육 장려에 노력하였다.

1907년(고종 44) 3월에는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개성학교 설립자는 학교를 사립으로 운영하기보다는 공립으로 하는 것이 교육상 득책이라고 인정하고, 1909년(순종 3) 1월에 교사와 학교 부지 일체를 정부에 헌납하였다. 정부는 이를 인수하여 같은 해 4월 9일부터 조직을 개편하여 공립부산실업학교와 보통학교의 2개 교로 운영하기로 하였고, 공동 경비로 같은 교사에서 가르치기로 하였다. 이것이 부산공립보통학교의 시초이다.

부산공립보통학교는 1909년 4월 9일에 중구 초량동에 개교하였다. 전 쓰루가[敦賀]상업학교 교장 복토덕평(福土德平)[후쿠시]이 공립부산실업학교 학감 겸 보통학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개성학교는 고등과 3년, 심상과 3년으로 생도 수는 고등과가 약 30명, 심상과가 약 120명 정도였다. 이 가운데 심상과 3학년은 보통학교 제4학년에 편입하였다.

1911년 1월에 영주동에 소재한 구 동래부(東萊府) 청사를 이양받아 분교장으로 하고, 1학년을 옮겨 수용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조선 교육령 시행으로 부산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12년 1월에는 전교생을 분교장으로 옮겨 본교사로 하게 되었다. 이때 여학생은 그대로 초량학교의 부지에 남아 있었다.

본래 부산공립보통학교는 교지가 협소하여 부산공립실업학교와 분리 이전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구 동래부 청사의 이양을 신청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동래 소재의 동래부 청사로 오인하여 기각하였는데, 이에 재차 신청하여 조선총독부의 현지 출장 확인으로 청사 이양을 허가받게 되었다.

1912년 4월에 부산공립실업학교로부터 독립하여 구 동래부 청사 터인 영주동으로 옮겼다. 위치는 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현 봉래초등학교로부터 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언덕[3,385㎡]이었다. 교사는 목조 단층 교실 4개, 직원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부지는 3단으로 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사택까지 들어 있어 매우 좁은 상태였다. 1923년부터는 부산공립보통학교에 속수 학교를 병설하였다. 본교 부설 속수 학교는 수업 연한 2년, 4학년 정도의 과정을 수료하도록 되어 있었다.

1924년에 6개 교실을 신축하여 초량에 떨어져 있던 여자부를 옮겨 와 합쳤으며, 1926년에는 속수 학교를 폐지하였다. 1938년에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학교명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심상소학교로 부르게 되어, 이때 부산봉래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었다. 1941년에 모든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여 부산봉래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45년 9월 24일에는 봉래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에는 봉래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육 활동]

부산공립보통학교는 조선인 아동을 대상으로 초등 교육을 실시하였다. 보통학교 교과목은 수신(修身),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算術), 이과(理科), 창가(唱歌), 농업 초보, 상업 초보와 남자에게만 과해진 수공(手工), 여자에게만 과해진 재봉 및 수예의 12과목이었다. 수신과 일본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 등 4과목은 필수였다. 조선어 및 한문 과목에서는 한문에 더 비중을 두어 교묘하게 조선어를 없애려고 하였다.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로 제국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천황이 죽었을 때에는 검은 깃을 달고 요배식을 올리게 하였으며, 부산의 경우는 총독이 일본에서 귀임할 때면 전교생이 부두에 나가 영접을 하고 다음 날 상경할 때에는 역에 나가서 전송을 하게 하였다. 범어사(梵魚寺)에 소풍 갈 때 부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영주동에서 동래까지 전차를 타고 갔는데, 전차 삯은 학교비로 지불하는 등 특이한 면도 있었다.

매년 2월 말에는 학생 모집 공고를 내어 3월 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해마다 불합격자가 많았다. 국권 상실기에는 보통학교 입학 지원자가 얼마 되지 않아 부산공립보통학교의 경우 1910년(순종 4)에 전교생이 203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차츰 입학 희망자가 늘어나 1914년 3월 25일에는 입학시험을 실시하여 지원자 120명 중 1학년 64명, 2학년 5명, 3학년 7명을 합격시키고 44명을 탈락시켰다. 다음 해는 지원자 85명 중 1학년 65명, 2학년 편입 3명 이외는 입학을 불허하였다. 이때는 낙제 제도가 있어 3월 말이 되면 성적 발표를 하여 유급자를 결정 공표하였는데, 한 학년에 9명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무렵 하단의 사립양정학교 학생 4명이 부산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지망하였으나 불허한 일도 있었다.

1914년부터는 수업료를 징수하였는데 1인당 10전 안팎이었고, 동래부청의 서기가 출장하여 징수하였으며 수업료는 전액 당해 학교 세입 재원으로 학교 예산에 편성 집행하였다. 당시는 여자 교육에 관심이 적은 때였으므로 여자 학생 유인책으로 수업료를 받지 않다가 1916년부터 받기로 하였으나, 다시 2년간 징수를 보류하여 1918년부터 징수하게 되었다. 2인 이상일 때에는 1인 초과자에게 반액만 받았다.

[현황]

부산공립보통학교는 2013년 현재 봉래초등학교로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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