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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계리 부여 백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017
한자 橫溪里夫餘白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Buyeo Baek Clan in Hoinggye-r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횡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10여 가구
세거지 횡계리 부여 백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횡계리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횡계리에 있는 부여 백씨 세거지.

[명칭 유래]

횡계리는 본래 홍계동(洪界洞)이라 불렀다. 마을이 일광산 기슭 넓은 골짜기 아래에 있어, 이 넓은 골짜기를 널골[넓은 골] 또는 큰골로 부르며 ‘넓을 홍(洪)’, ‘골 동(洞)’ 자를 써서 홍동(洪洞)으로 표기하였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계곡을 흐르는 작은 개울을 홍계(洪溪)라고 부르게 되며, 작은 개울을 넓은 시내로 부르는 오류가 발생하자 계(溪) 자를 발음이 같은 계(界)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홍계동(洪界洞)은 홍골 사이를 흐르는 개울을 끼고 있는 마을이란 뜻이 된다. 이후 홍계(洪界)가 되며 의미 불명의 이름이 되자 마을 앞을 가로 지른다 하여 ‘가로 횡(橫)’ 자를 쓰고, ‘계곡 계(溪)’ 자를 다시 써 횡계(橫溪)가 된 것으로 보인다. 「차성가(車城歌)」에 “난정(蘭亭)의 굽은 물이 비꼈으니 횡계(橫溪)로다.”라는 구절이 있어, 개울이 마을 앞을 가로 질러 흐르는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형성 및 변천]

부여 백씨(夫餘白氏)는 780년(혜공왕 16) 당(唐)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백우경(白宇經)을 시조로 한다. 중시조는 백창직(白昌稷)이며, 고려 숙종(肅宗) 때 부여공으로 봉군된 6세손 백영신(白英臣)을 파조로 한다. 그러나 파조에 대한 기록이 소실되어 실제 파보는 11세 백신원(白信元)으로부터 형성되었다. 여문(汝文) 백수해(白受海)가 1592년경 지금의 기장군 철마 지역으로 입향하였다. 백수해의 아들 백이청(白以淸)에서부터 백최광(白最光)→ 백세화(白世化)→ 백용채(白龍彩)로 이어졌다. 백용채의 두 아들 가운데 맏아들 백치상(白致祥)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백용채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백치일(白致逸)의 아들인 백기문(白起文)이 19세기 전반 일광면 횡계리로 이거하였다.

[자연 환경]

횡계리 남쪽에는 일광산[317m]을 중심으로 한 산지가 발달하고, 이 산지가 서쪽과 북쪽으로 연결되어 삼면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는 저산성 산지가 발달하여 있다. 북쪽과 서쪽, 동쪽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남동쪽으로 흘러 일광천에 유입한다. 소하천 주변 평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횡계리에는 부여 백씨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부여 백씨 기장 문중 재실인 여문재(汝文齋)가 있는데, 대지 1,256.20㎡[380평]에 팔작지붕 철근 콘크리트 한옥 양식이다. 건립일은 1989년으로, 54위의 위패를 모시고 10월 셋째 일요일에 묘사를 지낸다.

[참고문헌]
  • 『일광면지』(일광면지편찬위원회, 2006)
  • 인터뷰(부여 백씨 문중 백상철, 201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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