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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185
한자 儀禮服
영어의미역 Formal Suit
이칭/별칭 예복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권영숙

[정의]

부산광역시 지역에서 관혼상제를 비롯한 일반 예식에 갖추어 입었던 복식.

[개설]

의례복이란 의례 형식을 갖출 때 착용하는 복식을 말한다. 이를 ‘예복(禮服)’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는 부산 지역의 의례복 중에서도 관복과 통과 의례복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관복은 개항기에서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부산 지역 문화를 비롯한 한국의 개화기 문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낸 선각자 집안인 윤상은(尹相殷) 선생의 후손들이 남긴 사진 자료와 인터뷰를 통하여 살펴본다.

혼례복의 경우에는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부산 지역에 거주하면서 의생활 문화에 공로가 큰 80세 이상의 어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내용, 사진 자료, 문헌 자료 등을 근거로 하였다.

[관복]

우리나라에서 서구식으로의 관복 제도 변화는 1884년 갑신 의제 개혁(甲申衣制改革)을 비롯한 세 차례의 의제 개혁(衣制改革)을 통하여 영국 양식의 관복이 들어오게 된다. 『대한예전(大韓禮典)』[대한제국 때 펴낸 국가전례서(國家典禮書), 1898년(고종 35) 추정]에는 제4권 제복도설, 제5권 관복도설에 전통 복제로 된 관복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있다. 1900년(고종 37)에 「칙령 14호 문관 복장 규칙 제15호 문관 대례 복식 제정」을 반포하면서 문관 복식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당시의 문관 복장은 대례복(大禮服), 소례복(小禮服), 상복(常服) 등의 3종이 있었다.

1. 대례복

대례복은 궁중의 공식적인 행사에 입었다. 즉 하례식[陳賀]이나 공적이 있을 때, 그리고 궁중에 성찬식[陪食]이 있을 때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등이 착용하였다. 대례복을 갖추지 못한 관원은 소례복인 프록코트(frock coat)[상의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성용 예복]로 대치하였다. 대례복은 모자(帽子), 동의(胴衣), 고(袴), 혜(鞋), 검(劍), 훈장(勳章)으로 구성된다.

2. 소례복

소례복은 크게 서구식 연미복(燕尾服)과 프록코트로 구분된다. 프록코트는 궁내 진견(進見)할 때와 각국의 경축일과 하례식(賀禮式), 그리고 사사로이 예를 갖추어 방문할 때 입었다. 연미복은 각국의 사절들을 접견할 때와 궁중의 연회시(宴會時), 그리고 국내외 관리들의 만찬회 때 입었다. 의복의 구성은 모두 진사고모(眞絲高瑁), 상의, 바지[袴], 구두[鞋] 등으로 구성된다. 연미복과 프록코트의 차이는 상의의 형태와 바지의 구성에서 차이가 있었다. 대개 연미복은 상하의 동일한 재질로 하였으며, 프록코트는 상하의 다른 색으로 구성된다.

3. 상복

상복은 벼슬에 나아갈 때[仕進]와 집무(執務)할 때, 그리고 연거(燕居)[한가하게 집에 있음]할 때에 착용하였는데 서구식 평모(平帽)[중절모자(中折帽子)]에 뒤가 짧은 상의, 그리고 같은 재질의 바지를 입었다.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기종 대례복(朴琪淙大禮服)[1900년대 제작 추정]’은 문관 칙임관[정1품~종2품 관료] 시절에 착용하던 것으로, 칙임관 2등에 해당되는 복장이다.

[통과 의례복]

1. 백일 옷

아기가 태어나서 백 일째 되는 날에는 특별히 흰색으로 의식을 하는데, 흰색의 부드러운 천으로 백일 옷을 지어 입혔다. 남아, 여아 구별 없이 저고리와 배를 가리는 정도의 배포대기를 만들었으며, 잘 사는 사람들은 풍차바지에 타래버선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였다.

2. 돌옷[돌복]

아기가 자라서 일 년이 되는 돌에는 유색 옷을 입히는데, 남아는 풍차바지에 저고리를 입혔고 여아는 치마저고리를 입혔다.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아이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오방색을 사용한 색동저고리와 까치두루마기를 만들어 입혔다. 머리에는 여아는 굴레를 씌우거나 리본을 매게 하였으며, 남아는 호건을 씌웠다. 이런 픙속은 1950년대 이전에는 보편적이었으나, 해방 이후 양복이 들어오면서 서양식 옷을 입히기도 하여 여아의 경우 예쁜 드레스를 입히기도 하였다. 당시의 돌복은 주로 맞추어 입혔으나 집에서 손수 지어서 입힐 때는 명주 천을 색색이 곱게 물들여서 정성껏 지어서 입혔고, 서민층에서는 주로 어른들의 옷을 재활용하여 지어 입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3. 혼례복

여자들의 혼례복은 일반적으로 녹색 저고리에 홍색 치마를 입고 겉에는 원삼을 입었다. 동래 지역에서는 이 원삼을 ‘장의’라고도 칭하였다. 원삼의 색은 연두색이고 소매는 색동으로 되어 있으며 소매 끝에는 흰색의 한삼이 달려 있는 형태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원삼 안에는 대부분 붉은색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었으며, 머리는 쪽을 찌고 족두리를 쓰거나 화관을 썼다. 남자들은 사모단령(紗帽團領)에 관대 차림을 하였는데 일반적으로는 바지저고리 위에 단령을 입었다. 간혹 차려 입는 집안에서는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관복을 입기도 하였다고 한다. 단령의 색은 주로 남색에 홍색의 안을 바친 남색 단령을 입었으며 쌍학흉배(雙鶴胸背)를 하였다.

이러한 혼례복은 전문으로 빌려 주는 집이 있어서 빌려서 입었다고 하는데, 일부 예부터 집안에서 내려오는 혼례복이 있을 경우에는 대를 물려 입었다고 한다. 이 같이 해방 이전의 혼례 풍속은 대부분 전통 한복 차림의 혼례식이 일반적이었으나 간혹 개화된 집에서는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은 서양의 웨딩드레스에 양복을 입고 혼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4. 회갑 옷

회갑 옷은 특별하게 옷을 갖추어 입지는 않았으며, 항상 입던 옷을 깨끗하게 손질하여 입었다. 남자들은 회갑 시에 명주로 만든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고,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촌에서는 본목(本木)[다른 섬유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무명] 두루마기 속에 명주를 받쳐서 입는 것을 호사로 여겼다. 도회지에서는 기지 두루마기[짙은 색상의 양복감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호사로 여겼는데, 특히 세루(Serge)[양모 등의 능직물] 두루마기는 귀하게 여겼다. 회갑 시의 옷치레는 주로 자식들이 마련하여 맞추어 드리거나 직접 지어서 드리고 상을 차려 회갑 잔치를 해 드렸다.

5. 수의(壽衣)

수의는 시장에서 구입하여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평소에 본인이 즐겨 입었던 옷을 깨끗하게 손질하여 입거나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수의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수의를 직접 만들어서 준비할 경우에는 대개 윤달에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준비하였는데 주로 명주로 지었으며, 이불 및 깔개 등은 삼베를 사용하였다. 남자들의 수의는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나 도포 등을 준비하였고, 여자들의 수의는 치마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준비하였다. 속옷은 속바지 류와 속적삼, 그리고 버선 등을 준비하였으며, 그 외에 베개, 명목, 모자, 악수, 조발낭, 신발, 시신을 싸는 이불, 요, 천금, 지금 등을 함께 준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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