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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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次萊州雜詠 |
영어의미역 | Charaejujapy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진 |
[정의]
1607년에 이춘원이 동래 부사로 재임하던 중에 지은 한시.
[개설]
「차래주잡영(次萊州雜詠)」은 이춘원(李春元)[1571~1634]이 1607년(선조 40)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재임 중에 지은 한시로, 1605년(선종 38) 말부터 1607년 초까지 동래 부사로 재임하였던 윤훤(尹喧)[1523~1627]의 제영시에 이춘원이 차운한 것이다. 윤훤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에 「내주잡영」이란 명칭의 시는 없지만, 「차래주잡영」과 마찬가지로 「장산국(萇山國)」, 「태종대(太宗臺)」, 「정문도 묘(鄭文道墓)」 등의 제명으로 본집(本集)과 보유(補遺)에 17수의 제영시가 실려 있다.
『백사집』에 실려 있는 이들 시와 이춘원의 문집인 『구원 선생집(九畹先生集)』에 실려 있는 「차래주잡영」의 17수는 압운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만 『백사집』에서는 「차래주잡영」의 「정과정(鄭瓜亭)」이 「방정과정유기(訪鄭瓜亭遺基)」로, 「송상현사」가 「송공사(宋公祠)」로 시제(詩題)가 달려 있다. 그리고 「범어천(梵魚川)」이 「금정산(金井山)」으로, 「이정암 비(李廷馣碑)」가 「이후 비(李侯碑)」로 되어 있다. 이들 시는 모두 사찬 읍지인 『동래부지(東萊府誌)』의 「동래부지 제영 잡저(東萊府誌題詠雜著)」에 실려 있는데, 각각의 시에 모두 출전이 『인빈헌래주잡영(寅賓軒萊州雜詠)』으로 되어 있다.
이춘원의 『구원 선생집』에는 「차래주잡영」이라는 단일한 제명 하에 17수가 같이 실려 있지만, 『백사집』에서는 「장산국」, 「태종대」, 「방정과정유기」, 「정문도 묘」, 「송공사」, 「대마도(對馬島)」, 「별관」 등 7수는 권1에 실려 있고, 나머지 10수는 『습유(拾遺)』 권2에 실려 있다. 따라서 이춘원의 「차래주잡영」과 달리, 윤훤의 부산 지역 제영시들은 「내주잡영」이란 연작 한시(連作漢詩) 형식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춘원의 후임으로 동래 부사가 된 이안눌(李安訥) 역시 「내산록(萊山錄)」이라는 이름의 동래 제영시를 남겼으나, 「내산록」은 이안눌이 동래 부사로 도임(到任)할 때부터 이임할 때까지의 15개월 동안 부산 지역에 대한 견문과 감상을 시로 읊은 것으로서 다양한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차래주잡영」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렇게 볼 때, ‘차운’하였음을 밝히기는 하였지만 이춘원의 「차래주잡영」은 현전하는 죽지사류 연작 한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성]
「차래주잡영」은 총 17수로 된 7언 절구로 되어 있으며, 연작 한시라고 하지만 동일한 운을 쓰고 있지는 않다. 동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장산국에서 시작되어 태종대, 겸효대(謙孝臺), 소하정(蘇瑕亭), 해운대(海雲臺), 정과정, 몰운대(沒雲臺) 등 6개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누대를 읊은 후, 동래의 속현이었던 부산과 동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대마도를 읊었다.
이어서 지금의 온천천으로 보이는 범어천과 동래 온천을 뜻하는 온정(溫井), 그리고 정문도(鄭文道)의 묘와 이정암(李廷馣)의 비석, 송상현을 기리는 사당인 충렬사(忠烈祠), 옥효자(玉孝子), 동대(東臺), 별관(別館) 등을 읊었다. 「차래주잡영」은 전체적으로 볼 때, 동래 전 지역을 아우르는 장산국으로 시작해서 이춘원의 거소 부근인 별관으로 끝맺는 구심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내용]
「차래주잡영」은 이춘원이 전란의 화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때에 지은 때문인지 17수의 곳곳에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난다.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초토사 이정암의 비석과 왜적을 막다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을 기리는 충렬사를 읊고, 「부산」에서는 일본을 흉포한 오랑캐를 상징하는 경예(鯨鯢)로 표현하며 일본의 선박에 대해 흉범(凶帆)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부산’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부산(右釜山)」
만갑경예팽불득(萬甲鯨鯢烹不得)
외연고치경하공(巍然高峙竟何功)
약위차단동풍편(若爲遮斷東風便)
도척흉범원벽궁(倒擲凶帆遠碧穹)
그리고 「대마도」에서는 일본을 화수(禍首)라고 하면서 풀 옷을 입는 미개인이라는 뜻으로 훼복(卉服)이라 하였고, ‘옥백(玉帛)의 사신들이 구구하게 악귀들이 모인 곳에 제사 지내게 되었는가’라고 탄식을 하였다. 이는 이 시를 지은 1607년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춘원이 「차래주잡영」에서 읊은 태종대와 해운대, 정과정, 겸효대, 소하정, 몰운대, 동래 온천 등 7곳의 명승고적은 「차래주잡영」 이후로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으로 자리 잡게 된다. 「차래주잡영」에는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 묘인 ‘정문도 묘’를 읊은 시가 있는데, 그 속에 ‘벼슬아치들이 줄지어 고분(古墳)에 찾아오네’라는 구절이 있어, 당시에도 이춘원 자신을 포함한 많은 벼슬아치들이 정묘(鄭墓)에 참배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윤훤의 「방정과정유기」라는 시제와 이춘원의 「차래주잡영」의 「정과정」 가운데 ‘한 곡조의 거문고 소리 들리고 파도가 모래를 치네[一曲琴聲浪拍沙]’라는 구절로 보아 「차래주잡영」이 지어진 1607년에는 이미 정과정이 자취만 남아 있었고, 정과정 가까운 곳에 모래사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징]
「차래주잡영」은 부산 지역의 명승고적을 대상으로 하면서 동일한 제명 하에 7언 절구 형식으로 짓고, ‘우〇〇〇’처럼 부제를 달아 제영의 대상을 밝힌 대표적인 작품이다.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제영 시문에서 많이 등장하는 정원루(靖遠樓)와 영가대가 없는 대신 이정암(李廷馣)의 비석과 옥효자, 동래 정씨 시조 묘 등이 제영 대상이 되고 있다. 「태종대」와 「대마도」, 「범어천」, 「동대」 등의 4수는 이 「차래주잡영」과 이춘원이 차운한 윤훤의 문집 이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동래부지 제영 잡저(東萊府誌題詠雜著)」의 ‘범어천‘, ‘대마도‘, ‘태종대’ ‘동대’ 등의 항목에는 윤훤과 이춘원 두 사람만의 시가 실려 있다. 이들 시는 윤훤과 이춘원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들과 같고 압운도 같다. 임진왜란 때 연안(延安)에서 왜적을 무찌른 공을 세운 이정암의 비석을 읊고 있어, 임진왜란 직후만 해도 이정암의 전공을 기리는 비석이 부산에도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