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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26
한자 金蟾
영어의미역 Geum-seom by Seong Haeeung
이칭/별칭 「김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류속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인물지
작가 성해응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60년연표보기 - 성해응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39년연표보기 - 성해응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15년~1826년 사이연표보기 - 창작
편찬|간행 시기/일시 1840년 무렵연표보기 - 『연경재전집』 속의 「초사담헌」에 수록
배경 지역 의열각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지도보기
배경 지역 동래성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청동 일대

[정의]

조선 후기 성해응이 동래 부사 송상현의 애첩이었던 기생 금섬을 기린 작품.

[개설]

「금섬」은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시켰을 때 전사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효와 충절을 선양함과 동시에, 그의 애첩이자 열녀였던 함흥 기생 금섬(金蟾)을 기린 인물지(人物志)이다. 「금섬」은 성해응의 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속의 「초사담헌(草榭談獻)」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금섬」은 기생 금섬의 출신 사항과 동래로 오게 된 연유를 간략하게 기술한 도입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송상현과 그를 따라 죽은 금섬을 자세하게 묘사한 전개부, 후에 영남 사람들이 그들을 사당에 배향했다는 결말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함흥 출신의 기생이었던 금섬은 임진년[1592]에 송상현의 애첩이 되어 동래부로 따라왔다. 1592년 4월 15일, 송상현은 동래성을 침략해 온 왜군에 맞서 남문(南門)에 올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었다. 이전에 일본과 왕래할 때 송상현에게 지극한 대접을 받은 바 있었던 평조익(平調益)이란 왜인이 송상현에게 보답하려고 옷을 끌어당기면서까지 성 밖으로 피하라 했으나 송상현은 응하지 않았다. 송상현은 임금께 절을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군신의 의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습니다[君臣義重 父子恩輕]”란 글을 남기고는 죽음을 맞이했다. 금섬도 왜적에게 잡혔으나 오히려 적을 욕하고 죽임을 당했다. 왜적은 송상현금섬의 시체를 동문 밖에 묻고 나무를 세워 표시했다. 후에 왜장이 송상현을 죽인 왜적을 끌어내어 죽였더니 남문 위에 붉은 기운이 하늘을 밝히며 수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영남 사람들은 송상현과 함께 금섬을 사당에 모셔 제사 지냈다.

[특징]

일반적으로 인물에 관한 기록은 전(傳)이나 행장(行狀)의 형식을 통해 일대기적 구성이나 행적의 나열로 이루어지나, 「금섬」은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 인물의 됨됨이를 뚜렷이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섬」에서는 금섬에 대한 서술이 간략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에서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의 행적과 금섬의 의로운 행적을 나란히 서술함으로써 비록 기생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기와 절개를 보였음을 그려 내고 있다. 훌륭한 사적을 이뤘으나 미천한 신분으로 자칫 묻혀 버릴 수 있었던 금섬을 의기(義妓)[의로운 기생]로 다시 살려 내어 후세에 전하고자 한 투철한 기록 의식의 결과물로서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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