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01 |
---|---|
한자 | 通信使使行文學 |
영어의미역 | Diplomatic Missionaries/Envoy Travel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한태문 |
[정의]
조선 시대 교린 외교 사절로서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사행원들이 부산에서 머무는 동안 창작한 문학 작품.
[개설]
통신사는 조선의 왕이 조선 왕조의 대일(對日) 기본 정책인 ‘교린’(交隣)[중국을 제외한 일본·거란 등의 주변국에 취했던 외교 정책]의 실현을 위해 1428년(세종 10)부터 1811년(순조 11)까지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인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한 외교 사절단을 일컫는다. 1811년 일본측이 외국의 사신을 본국의 중심부에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접대한다는 ‘역지빙례(易地聘禮)’ 정책을 폄에 따라 12차 조선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했으며 이후 통신사의 왕래가 끊겼다. 통신사는 표면적으로는 교린 외교 사절이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인과의 문화 교류를 염두에 둔 문화 사절단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 조정이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난 세 명의 사신을 비롯하여 제술관(製述官)·서기(書記)·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악대(樂隊)·마상재(馬上才) 등 한결같이 문학적 재능과 기예(技藝)로 당대를 대표하는 400~500여 명의 인원으로 통신사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일본인과의 문화 교류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문학 교류였다. 성종(成宗)은 몸소 시제(詩題)를 내어 군관(軍官)을 선발했고, 서장관으로 뽑힌 이가 시문 창작에 문제가 있다 하여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이 통신사를 선발할 때 시문 창작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시문 창화를 임무로 하였던 제술관을 비롯한 3인의 서기와 자제군관(子弟軍官), 그리고 비장(裨將) 등은 문장에 뛰어난 인원들이 대거 편제되었다.
특히 통신사에 선발된 문장가들 가운데는 능력은 뛰어나되 신분 제도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여항인(閭巷人)[일반 백성]과 서얼(庶孼)들이 많았다. 이들의 사행 참여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과시할 기회이자 답답한 가슴을 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 결과 일본인과의 문학 교류가 활성화되어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과 같은 필담 창화집(筆談唱和集)으로 발간되어 오늘에 전한다.
게다가 사행 체험의 특이성 또한 통신사 사행 문학 형성에 막대한 이바지를 하였다. 통신 사행은 중국 사행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닷길 여행이었다. 따라서 통신 사행이 지니는 체험의 가치는 실로 소중했기에 사행원들도 이를 온전히 기록하려는 욕구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사록(東槎錄)』과 같은 다양한 사행록은 이러한 의식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전개]
통신사 사행 문학은 크게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눌 수 있다. 1428년(세종 10), 1439년(세종 21), 1443년(세종 25), 1590년(선조 23), 1596년(선조 29) 등 총 5차례 파견된 조선 전기 통신사도 일본인과의 문학 교류를 활발히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증빙할 문헌 자료가 조선 후기 통신사보다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1428년 통신사 정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지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느낀 바가 있어[奉使日本有感]」를 비롯한 3수의 시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또한 1443년 통신사 서장관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견문기인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와 「아카마 가세키 아미타지의 판상에 있는 옛 통신사 고득종의 시를 차운함[赤間關阿彌陀寺板上次昔年通信使高得宗詩]」을 비롯한 시 2수를 『해행총재(海行摠載)』에 남기고 있다. 이밖에 1590년 통신사 부사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시와 편지 등이 수록된 『해사록(海槎錄)』을 남겼는데, 특히 시는 왕명을 받고 출발하는 시점부터 국내외 노정 전체를 담고 있어 조선 후기 사행 문학에 뒤지지 않는 성과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1607년(선조 40), 1617년(광해군 9), 1624년(인조 2), 1636년(인조 14), 1643년(인조 21), 1655년(효종 6), 1682년(숙종 8), 1711년(숙종 37), 1719년(숙종 45), 1748년(영조 24), 1763년(영조 39), 1811년(순조 11) 등 총 12차례 파견되었다. 횟수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 통신사 사행 문학은 조선 전기 통신사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첫째, 경섬(慶暹)의 『해사록(海槎錄)』[1607]을 비롯하여 유상필(柳相弼)의 『동사록(東槎錄)』[1811]에 이르기까지 사행마다 다양한 사행록이 산출되었다. 이들 사행록은 크게 ①임광(任絖)의 『병자일본일기(丙子日本日記)』[1636]처럼 ‘일기’만으로 된 것, ②신유(申濡)의 『해사록』[1643]처럼 ‘시’만으로 된 것, ③오윤겸(吳允謙)의 『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1617]처럼 ‘일기+시’로 된 것, ④경섬의 『해사록』처럼 ‘일기+잡문[각종 편지와 견문록을 포함]’으로 된 것, ⑤조경(趙絅)의 『동사록』[1643]처럼 ‘시+잡문’으로 된 것, ⑥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1719]처럼 ‘일기+시+잡문’으로 된 것 등으로 다양한 구성 방식을 보이되 ⑥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사행록에 보이는 서술 양식의 복합성은 통신 사행의 특이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효과적인 방편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통신사와 일본인과의 필담 창화를 엮은 ‘필담 창화집’이 일본에서 많이 발간되었다. 필담 창화집의 발간은 포로 쇄환에 초점을 두었던 초기 3차례의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와 달리 ‘통신사’ 명칭이 부활한 1636년(인조 14)을 기점으로 양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선필어(朝鮮筆語)』[1636], 『기조선국박진사오편(寄朝鮮國朴進士五篇)』[1643], 『조선신사동사기행(朝鮮信使東槎紀行)』[1655]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 필담 창화집은 참여 인원이 극소수인 데다 증시(贈詩) 형태가 많아 온전한 필담 창화집의 모습은 아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필담 창화집의 등장은 제술관의 파견으로 문학 교류가 증대되어 『화한창수집(和韓唱酬集)』과 『상한필어창화집(桑韓筆語唱和集)』 등의 필담 창화집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1682년 통신사부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필담 창화집은 사행원들의 ‘사행록’과 달리, 문학을 통한 양국 문인 사이의 교류를 객관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어 한일 문학 교류사적 의의가 크다.
[사행 문학 속의 부산]
부산은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로 일컬어지는 왜관이 존재한 대일 외교의 중심지로, 교토[京都]나 에도[江戶]로 향하는 통신사나 쓰시마[對馬島]로 향하는 문위행(問慰行)에 대한 최종적인 점검이 이루어진 곳이다. 게다가 사행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격려 행사라 할 수 있는 전별연(餞別宴)과 사행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海神祭) 등 공식적인 행사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사행이 부산에 도착하면 짧게는 16일[1617년]에서 길게는 51일[1719년]까지 평균 1달 정도를 머물렀기 때문에 사행원들의 부산 관광은 거의 정례화되었다. 그 결과 통신사에 참여한 뛰어난 문장가들에 의해 부산에 대한 견문과 감상이 시문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사행원들이 관광한 곳은 동래에서 머물 때는 주로 충렬사(忠烈祠)와 정원루(靖遠樓)·온정(溫井)이었다. 대표적으로 충렬사의 경우 송상현(宋象賢)[1551~1592]과 정발(鄭撥)[1553~1592]로 대표되는 ‘충렬(忠烈)’과 일본으로 향하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눈물’을 대비시킨 김인겸(金仁謙)[1707~1772]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가 있다.
동래를 떠나 사행이 도일을 앞둔 국내 노정의 종착지인 부산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나면 부산에 대한 본격적인 관광이 이루어졌다. 관광지는 정묘(鄭廟)·태종대(太宗臺)·영가대(永嘉臺)·몰운대(沒雲臺)·해운대(海雲臺)·왜관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정묘와 태종대는 부산 객사 가까이 있는 증산(甑山)에서 사행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정묘는 김지남(金指南)[1654~?]의 『동사일록(東槎日錄)』에 동래 정씨의 발복담(發福譚)을 배경으로 명당(明堂)으로, 태종대는 신유의 「태종대」란 시에 ‘신선의 가마’가 머물렀던 신선경(神仙境)으로 그려진다.
또 영가대·몰운대·해운대 등은 사행원들이 손꼽았던 부산의 3대 절경이다. 홍우재(洪禹載)는 비를 맞으며 영가대에 올라 불확실한 귀환에 대한 불안감을 「우중영가대(雨中永嘉臺)」란 시에 드러내고, 신유는 「몰운대」란 시에서 몰운대를 옥황상제가 사는 옥경(玉京)에 비겼다. 그리고 조엄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몰운대를 “꽃밭 속에서 화장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로, 해운대를 “흉금을 드러낸 훤칠한 사내대장부의 기상”으로 비교한다.
이밖에 김지남은 『동사일록』에 왜관의 개시(開市) 풍경을 묘사하고 있고, 홍우재도 왜관의 개시를 구경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한다.
「부산가 기이 (釜山歌其二)」
연시능라만탁타(燕市綾羅萬槖駝)[연경 시장엔 비단과 낙타가 많다더니만]
초량조일금범다(草梁朝日錦帆多)[초량엔 오늘 아침 비단 돛이 많구나]
주중매견만아무(舟中每見蠻兒舞)[배 위에서 매번 오랑캐아이 춤을 보는데]
안상희문북객가(岸上稀聞北客歌)[언덕 위에 드문드문 북객의 노랫소리 들리네].
연경(燕京)의 시장과 초량(草梁)의 시장을 대비시켜 시상을 전개한다. 번화한 거리, 무역의 도시, 문화의 교류지로서의 거대한 시장이라는 공간 설정은 비슷하다. 하지만 연경의 시장이 아름다운 비단이 펼쳐지고 낙타가 오가는 다소 분주함 속에서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공간임에 비해, 초량의 아침은 비단 돛만이 화려하게 펼쳐져 오히려 사행을 떠나는 배들의 정처 없는 지향성을 느끼게 한다. 곧 작가는 두 도시의 대비를 통해 일본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산은 통신사를 통해 다른 지역 문인들로 하여금 부산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은 바로 뛰어난 문인들로 하여금 지역 명소를 소재로 한 다양한 시문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부산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부한 문학 유산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