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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784
한자 言論-出版
영어의미역 Journalism and Publication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학림

[정의]

부산광역시의 언론·출판의 역사.

[신문]

1. 개항기의 신문

개항장 부산은 근대 신문이 가장 먼저 출현하였던 곳이다. 그것은 일본인 신문이었는데, 『조선 신보』로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1881년(고종 18) 부산 지역에 진출한 일본 상인 단체인 부산상법회의소가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본정(本町)[중구 동광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창간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1883년 창간]와 이를 잇는 『한성주보』[1886년 창간]는 100~500부가 부산 지역에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1896년 창간]은 지사와 우편망을 통해 부산에 배포되었다. 1904년(고종 41)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부산항 좌천 서약국을 지사로 두어 부산에 보급되었다. 이후 1909년(순종 3)에 진주에서 한국 최초의 지방 신문인 『경남 일보』가 창간되어 역시 부산에 보급되었다.

2. 일제 강점기의 신문

일제 강점기에 부산 지역에서는 한국인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였으며, 일본인 신문이 양대 신문으로 자리 잡았다. 먼저 『조선 시보』는 1892년(고종 29)부터 1941년까지 존속한 일본인 신문이었다. 1892년에 창간되어 경제 정보를 보도하던 부정기 신문인 『부산 상황(釜山商況)』과 그를 잇는 『동아 무역 신문』이 전신이다.

1894년(고종 31)에 일본인 기자 아타치 겐조가 부산상업회의소 대표 등과 합자 회사를 설립해 휴간 중이던 『동아 무역 신문』의 지령을 이어받아 『조선 시보』를 재창간하였다. 한글 기사도 포함하는 6면의 일간지인 『조선 시보』는 국수주의 단체인 쿠마모토국권당이 중심이 되어 쿠마모토 사람들 일색으로 운영하였다. 이들은 “조선 녀학생은 음탕하야 실로 처녀다운 녀학생은 이분지 일도 못 된다” 등의 민족적 편견을 심하게 드러내는 기사를 썼다.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의 최대 신문은 1905년(고종 42)부터 1945년까지 존속한 『부산 일보』로, 쿠마모토 출신의 아쿠타가와 집안이 세습 운영한 개인 소유의 신문이었다. 1905년에 『조선 일보』라는 이름으로 창간해 곧 『조선 시사 신보』로 명칭을 바꾸었고, 1907년(순종 1)에 『부산 일보』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23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조석간 체제를 도입하였으며,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수산왕(水産王)이라 일컬어진 부산의 유력 자본가 카이시 겐타로[香椎源太郞]가 사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1년에 조선총독부언론 통폐합 정책에 따라 부산의 『조선 시보』, 마산의 『남선 일보』를 통합해 일제 말기 부산·경상남도의 독점 신문이 되었다. 『부산 일보』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뒤를 잇는 조선 제2의 신문이었다.

3. 8·15 광복~6·25 전쟁기의 신문

8·15 광복부터 6·25 전쟁 발발까지 부산 지역은 신문의 춘추 전국 시대를 이루었다.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려는 주의 주장을 담은 신문이 12개나 창간되었는데, 1945년에 『민주 중보』[중립]와 『부산 정보』[극우], 『조선 일일 신보』[우익], 『인민 해방보』[극좌], 『부산 매일 신문』[중립], 『대중 신문』[좌익], 『신한 일보』[극우]가 생겼고, 1946년에는 『자유 민보』[우익], 『부산 신문』[중립], 『부산 일보』[중립]가, 1947년에는 『산업 신문』[중립]이 창간되었다. 1948년 9월 제1 공화국 시절에는 『항도 일보』[중립]가 등장하였다. 미군정의 통제와 경영난 등으로 이들 신문은 1~4년여 만에 거의 폐간되었으며, 4개 신문만이 6·25 전쟁 이후까지 발행되었다.

이 중 『민주 중보』는 해방 정국의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간된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일본인 신문인 『부산 일보』의 사옥과 시설을 인수해 『부산 일보』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하였다. 원래 ‘중보(衆報)’였던 이름을 미군정이 들어오자 『민주 중보』로 바꾸었으며, 1950년에 『민주 신보』로 다시 변경하였다. 『민주 신보』는 미군정의 정간 조치에도 버텼으나 1953년 11월에 부산 역전 대화재로 사옥과 시설, 자료를 모두 잃고 사세가 기울었으며, 1962년 5·16 군사 정변 직후 창간 17년 만에 폐간되었다.

『자유 민보』는 일제 강점기에 『시대일보』 기자를 하였던 양산 출신의 김철수가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1946년에 창간한 신문이다. 『자유 민보』 역시 1953년의 부산 역전 대화재로 사옥이 전소되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4·19 혁명 직후 친여적인 보도로 독자를 잃고 창간 14년 만에 폐간되었다.

4. 6·25 전쟁~현대의 신문

6·25 전쟁 이후까지 유지된 4개 신문 중 『부산 일보』『국제 신문』은 부산의 양대 신문이다. 『국제 신문』은 1947년에 『동아 산업 시보』와 『수산 신문』을 통합해 창간한 『산업 신문』으로 출발하였다. 『민주 중보』 기자 출신으로 『수산 신문』을 발행하던 김형두가 일본 큐슈의 『니시니혼 신문』을 모델 삼아 만든 신문이었다. 『산업 신문』의 제1대 사장은 30% 주식을 인수한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김지태였다. 1950년에 제호를 『국제 신보』로 바꾸고 외국 통신사와의 독점 계약, 세계통신 설립 등을 통해 6·25 전쟁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경영난에 부닥쳤다.

이후 1964년에 럭키그룹이 『국제 신보』를 인수한 뒤 동양텔레비전 부산방송국과 제휴해 TV로 『국제 신보』 뉴스도 내보내고, 국제 가요 대상도 운영하였다. 1977년에 제호를 『국제 신문』으로 바꾸었고, 이듬해에는 『주간 국제』를 창간하였다. 『국제 신문』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0년 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에 따라 『부산 일보』에 흡수되어 33년 만에 문을 닫았으며, 6월 민주 항쟁 이후인 1989년 강제 폐간 8년여 만에 복간되었다. 1990년부터 1999년까지 롯데그룹이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1997년에 조간으로 전환하였다.

『부산 일보』는 1946년에 동래 출신의 박수형이 한때 『민주 중보』가 사용하던 옛 일본인 신문 『부산 일보』의 사옥과 시설의 관리권을 인수받아 창간한 신문이다. 1949년에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자 당시 『산업 신문』 사장인 김지태가 경영난을 겪던 『부산 일보』를 인수하였으며, 『대중 신문』까지 흡수 통합하였다. 1951년 1·4 후퇴 직후 미군에 의해 사옥을 강제 징발당한 뒤 1953년까지 2년간 남포동, 충무동 임시 사옥을 전전하였으며, 1953년의 부산 역전 대화재로 사옥이 다 타 버렸으나 김지태의 자본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5·16 군사 정변에 들어선 군사 정권은 1962년에 김지태로부터 『부산 일보』와 부산문화방송, 부일장학회 등을 빼앗았다. 5·16장학회에 인수된 『부산 일보』는 향후 여당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1978년에 타블로이드판 『주간 부산』을 창간해 1980년 언론 통폐합 때까지 지령 112호를 냈다. 1980년에는 『국제 신문』을 흡수 통합하였으며, 1988년 7월에 언론사 최초의 파업을 하면서 편집국장 추천제를 성취하였다. 이 파업은 이후 언론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6월 민주 항쟁 이후인 1989년에 부산에서 제3의 신문인 『항도 일보』가 창간되었다. 『항도 일보』는 이듬해에 조간으로 전환한 뒤 제호를 『부산 매일 신문』으로 바꾸었고, 1991년에는 다시 『부산 매일』로 바꾸었다. 1990년에 경제 일간지 『부산 경제』를 창간하였으나 1996년에 『부산 매일』에 통합시켰다. IMF 경제 위기로 1998년 창간 10년 만에 『부산 매일』은 휴간에 들어갔으며, 부산은 다시 양대 신문 경쟁 체제로 돌아갔다.

[방송]

1. 라디오 시대

라디오 시대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에 경성방송국의 개국으로 열렸다. 부산 지역에서는 9년 뒤인 1936년, 부산방송국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복병산 기슭에 사옥을 짓고 개국하였다. 부산방송국은 청취자 확보를 위해 일본어와 조선어 이원 방송을 하였으며, 동래군 서면 대연리에 동래 수신소도 세웠다. 1948은 우리 방송사의 원년으로 미군정청이 장악하였던 방송국들이 정부 공보처에 흡수되면서 KBS국영방송이 출범하였으며, 이때 KBS부산방송국은 10개 지방 방송국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1947년에 국제무선위원회에서 일제 강점기의 호출 부호 JB와 다른 한국 고유 호출 부호 HL을 할당받았는데, 이때를 한국 방송사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6·25 전쟁기인 임시 수도 시절에는 KBS 부산 방송국이 중앙 방송국 역할을 했으며 하루 10시간 30분 동안 방송을 하였다. 환도 후인 1953년에는 부산 역전 대화재로 부산방송국이 전소되어 상당 기간 미군 설비를 빌려 임시 방송을 하였다. 부산 정치 파동의 와중인 1952년 6월 12~14일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을 일시 중단시켜 버리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하였다. 환도 후인 1953년에는 부산 역전 대화재로 KBS 부산 방송국이 전소되어 상당 기간 미군 설비를 빌려 임시 방송을 하였다.

1959년 4월에는 부산문화방송국이 개국하여, 부산 지역에서 한국 최초의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이 등장하였다. 서울문화방송 개국보다 2년이 빨랐다. 실업인 김상용과 라디오 상회를 운영하던 정환옥은 사람들이 국영 KBS 방송을 외면하고 일본 방송을 많이 듣는 사실에서 민간 방송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그해 12월에 부산기독교방송이 개국함으로써 1959년 연말부터 부산은 KBS, MBC, CBS 등 3개 라디오 시대로 접어들었다. 1960년 4월에 적자가 누적되던 부산문화방송의 경영권은 『부산 일보』와 조선견직을 운영하던 김지태에게 넘어가 한국 최초로 신문과 방송을 겸업하는 사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2. 흑백 TV 시대

5·16 군사 정변 이후 TV 시대가 막을 올렸다. 1961년 12월 31일에 KBS-TV[채널 9]가 민심을 무마하기 위한 정권의 필요에 의해 맨 먼저 서둘러 개국하였다. 부산KBS TV[채널 5]는 한참 뒤인 1968년 4월에 일본의 NHK의 도움 아래 멕시코 올림픽을 전국에 중계하기 위해서 개국하였다. 이에 앞서 부산 지역에서 TV 시대를 처음 연 것은 삼성의 동양방송[D-TV]이었다. 동양방송은 1964년 12월 7일 서울 개국에 이어 동년 동월 12일에 부산국[채널 9]을 개국하였다. 부산에서 ‘쇼쇼쇼’ 등의 서울 프로그램은 항공이나 철도로 우송하여 일주일 늦게 방송되었다. 동양방송은 1966년 8월에 TBC-TV로 명칭을 바꾸었다.

MBC-TV는 1969년 8월 서울 개국[채널 11]에 이어 1970년 1월에 부산국[채널 12]을 개국하였으며, 이후 부산MBC는 1971년 9월에 럭키그룹에게 인수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60~1970년대 부산 지역에서 일본 TV 시청 붐이 일었다는 점이다. 1964년 10월에 박정희 대통령도 토쿄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이 메달 따는 장면을 TV로 보기 위해 유엔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부산에 왔었다.

3. 컬러 TV 시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컬러 TV 시대가 열렸다. 대신 국내 방송사들은 강제로 통폐합되었다. 그해에 TBC가 KBS에 흡수됨으로써 부산TBC도 16년간의 부산 방송 시대를 마감하였다. MBC는 가맹사에서 계열사 체제로 통폐합되었는데 부산MBC[라디오/TV]의 주식 51%가 서울MBC에 인수되어 버렸다. 1985년에 별개 법인으로 있던 부산MBC 라디오와 TV가 합병되었다. 부산MBC는 1995년에 중구 중앙동에서 수영구 민락동옮겨 신사옥 시대를 열었다. 부산KBS는 1984년에 부산방송본부로 바뀌어 1988년에 동구 수정동에서 수영구 남천동의 신사옥으로 이전하였으며, 1993년에 부산방송총국으로 격상되었다.

1995년에는 지역 민영 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부산방송PSB가 한창을 최대 주주로 하여 개국하였다. 2002년에 최대 주주가 넥센타이어로 바뀌었고, 2005년에 경상남도를 포괄하는 광역 방송으로 확대한 뒤 2006년에 KNN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출판]

부산 출판문화의 여명기는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27년 부산 사람들에 의한 잡지 『경제 운동』, 『노우(勞友)』, 『낙동강』의 창간 시도가 확인되고, 1930년대 초반에 『보건 조선』과 『실업 시보』가 상당 기간 발행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1920~1930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정국의 부산에서는 1946년에 『신조선』, 『중성(衆聲)』, 『전선』 등의 잡지가 창간되었으며, 5년간 시인 염주용의 문예신문사가 몇 권의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1960~1970년대에는 아동 문학가 이주홍 발간의 『문학 시대』를 비롯해 문예지인 『부산 문학』, 『남부 문학』, 『오늘의 문학』과 많은 동인지가 출간되었다. 1980년 전후 부산의 출판사는 제일문화사, 소문당, 태화출판사, 문성, 광문, 새로, 국제, 일광, 일중사 등으로 인쇄업을 주로 하면서 부수적으로 책을 출간하는 곳이 많았다.

1980년대 들어 지역 출판문화의 장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언론 통폐합의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부산 지역에서는 무크지 운동이 일어나 『지평』[1983년], 『전망』[1984년], 『토박이』[1984년]가 발간되었다. ‘지역’을 기치로 내건 출판사 시로와 부산문예사도 출범하였다. 1979년에 설립된 뒤 1982년에 재출범한 시로는 부산 지역 최초의 문학 전문 출판사로, 10여 년 이상을 버티면서 200종이 넘는 책을 냈다. 1982년에 지역 문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부산문예사는 무크지 『지평』을 탄생시킨 뒤, 『지평 신서』 등의 발간을 통해 당시 부산 출판사 중 가장 뚜렷한 방향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은 지평출판사[1983년]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사회적 해빙 무드에 힘입어 본격적인 지역 출판문화의 장이 펼쳐졌다. 빛남출판사[1988년, 2010년 휴업]와 도서출판 해성[1989년], 도서출판 전망[1992년]이 차례로 출범하였다. 1980년대 부산 지역의 무크지 운동에 직간접적인 뿌리를 둔 이들 출판사는 2000년대에 각각 시와 소설, 평론에 방점을 찍으면서 부산의 3대 문학 출판사로 큰 역할을 하였다. 책펴냄열린시[1991년]는 1980년대를 빛냈던 부산의 시 동인 열린 시의 멤버 강영환 시인이 만든 출판사이다.

1990년대 말 이후에는 부산 출판문화의 장에 새로운 출판사들이 등장하였다. 푸른 별[1998년]과 말ᄊ·ᆷ[1998년], 작가마을[2002년]은 지역 문화에 뿌리를 튼 문인이 만든 문학 중심의 출판사이다. 시와사상[2001년]과 신생[2003년]은 시 전문 계간지를 토대로 한 출판사인데, 이 중 신생은 도서출판 전망의 자매 출판사이다. 비온후[2000년]는 1990년대 부산 지역에서 발간되던 월간 『이상 건축』의 기자 등이 함께 만든 건축 전문 출판사이다. 이들 출판사의 등장으로 부산 출판문화의 장은 제법 풍성해졌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산지니[2005년]와 호밀밭[2009년]의 등장으로 부산 출판문화는 또 한 번의 도약을 하고 있다. 산지니와 호밀밭은 전망/신생, 해성 등과 더불어 인문 사회 분야뿐 아니라 문학 분야까지 아우르는 참신한 기획으로 전국 시장을 겨냥하는 지역 출판사로서 힘차게 발돋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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