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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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鹽田 |
영어의미역 | Bungae Salt Pond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1동|용호3동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류승훈 |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던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금을 생산하던 염전.
[개설]
조선 시대 남촌면은 현재 부산광역시 남구 일대로 당시 제염지가 50% 이상 몰려 있던 곳이다. 19세기 후반의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에서는 동면(東面)에 23좌, 남촌(南村)에 31좌, 부산(釜山)에 4좌, 사하(沙下)에 7좌로 총 65좌의 소금가마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분개 염전[盆浦鹽田]은 조선 시대 동래 남촌면에 속한 염전으로 동래 지역에서는 소금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당시 분개 염전의 지형은 남해와 마주하고 있는 작은 만이었다. 남해안의 염전들은 대부분 굴곡된 작은 만에 조성되어 있었으며, 도랑을 따라서 물이 자연스럽게 제방 안으로 들어오는 입빈식(入濱式)이었다.
[변천]
분개[盆浦]의 ‘분(盆)’은 소금을 굽는 가마를 뜻한다. 이 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약 400년 전 현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의 석포(石浦) 마을 동쪽의 염전을 개발한 것이 첫출발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사분개[四盆浦]’라고 하는데, 부경대학교 앞바다로 넓은 갯벌이 있어 염전을 조성하기 쉬운 곳이었다. 이후 조수의 움직임에 의하여 자연적인 매립이 이루어져 점차 용호동(龍湖洞) 쪽으로 염전이 옮겨 갔다. 당시 용호동은 민가 없이 소금을 굽는 동이[盆]만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분’이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분포’ 또는 ‘분개’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이곳의 염전을 분개 염전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한 제국 말 일제는 일본식 제염 방식을 조선에 도입시키려 하였다. 일제는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과학적·생산적인 일본의 제염법으로 조선의 제염 방식을 개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일제의 관문이던 동래의 분개 염전은 최초 일본식 시험장이 건설되어 일본의 제염업이 도입되는 시험대로서 역할을 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제염업 개량 시책으로 이곳에 최초로 전오염(煎熬鹽) 시험장을 설치하였다. 시험장의 총면적은 약 3,547.11㎡[7,123평]로 일본식 40%, 절충식 36%, 한국식 24%를 차지하였다.
분개 염전의 변화는 경상남도 일대의 염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방 후에는 제염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이규정이 분개 염전을 운영하였다. 1950년대까지도 분개 염전에서는 전오염을 생산해 왔으나, 1962년 하수 처리장이 건립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1965년에는 동국제강이 염전 부지에 들어섰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택지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위치]
분개 염전은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 1동과 3동에 위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한 제국 말 일제는 동래의 분개 염전과 김해의 명지 염전에 대해 조사하여 「염업 조사」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경상남도 일대의 제염지 가운데 분개 염전과 명지 염전은 소금 생산량이 많고 제염업에서 상징적이었던 곳이다. 이후 일제에 의하여 전오염 시험장이 건립되면서 종래의 자염업이 변화되었고, 경상남도 일대의 제염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