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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987
한자 釜山地區戒嚴合同搜査團
영어의미역 The Joint Investigation Team under Martial Law in Busan
이칭/별칭 합수단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수사 기관
설립 시기/일시 1979년 10월 18일연표보기 - 설치
해체 시기/일시 1981년 1월 24일연표보기 - 해체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정의]

1979년 부산지구 계엄사령부에 설치된 합동 수사단.

[설립 목적]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은 「계엄법」 제16조에 규정된 죄 및 포고령 위반 사건 등 중요한 사건을 수사 처리하기 위하여 계엄 사령부에 합동 수사단을 편성, 운영하였다.

[변천]

1979년 10월 18일 자정을 기해 부마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선포된 비상계엄은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박정희(朴正熙)가 살해되는 10·26 정변이 발생하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확대, 선포되었다. 이에 따라 1979년 10월 27일 계엄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鄭昇和)의 명의로 공포된 계엄 공고 제5호에 따라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에 합동 수사단을 설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설치 당시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약칭 합동수사단]의 주요 임무는 부마 항쟁의 배후 세력을 찾는 것이었다. 이에 가두시위 참여자는 경찰 조사를 거친 후 헌병대로 이관되어 군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은 부마 항쟁의 배후 세력으로 당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과 중부교회 등의 재야인사들을 주목하고, 이들에게 수사력을 집중하였다.

김광일(金光一) 변호사, 최성묵(崔聖黙) 목사, 박상도 도시산업선교회 총무, 김형기 중부교회 청년부 지도자, 김영일 중부교회 청년부 회장 등 최소 100명 이상이 부마 항쟁의 배후 세력임을 자백하라는 강요와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부마 항쟁은 학생 시위를 제외하면 자연 발생적인 민중 항쟁이었기 때문에 배후 세력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때마침 10·26 정변으로 박정희가 피살됨으로써 동력을 상실한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은 이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의 조합장과 전무를 강박하여 해산을 강요하였고, 결국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은 해산되었다.

1980년 전두환(全斗煥)의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일으키자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은 이른바 예비 검속을 자행하였다.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신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할 우려가 있는 재야인사와 학생 간부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부산직할시 수영구 망미동에 있는 국군보안사령부 분실로 수용한 것이다. 이들은 군인들의 무차별 구타와 고문, 폭언에 시달리면서 장기간 구금되었다. 정상적인 법 절차는 완전히 무시되었으며 인권은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동시에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은 부산 지역의 민주 인사들을 소환 조사하고 공포감을 심어 신군부에 대한 저항을 위축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기윤(林基潤) 목사는 1980년 7월 26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1979년 10월 18일부터 계엄령이 해제되는 1981년 1월 24일까지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은 신군부의 쿠데타에 동원된 도구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지구 계엄합동수사단의 활동은 군부 독재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불행했던 과거의 단면으로, 민주 사회의 지향에 반면교사가 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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