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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984
한자 三國-統一新羅時代-佛敎
영어의미역 Buddhism in the Three Kingdoms and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최연주

[정의]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불교.

[개설]

삼국·통일 신라 시대 불교계는 불국토 사상과 의상(義湘)원효(元曉)에 의해 주도된 화엄 및 원융 사상이 중심적으로 전개되었다. 금관가야(金官伽倻)법흥왕(法興王) 대에 흡수되면서 신라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지만, 가야 불교의 전통도 일부 남아 있었다. 668년에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문화까지 포괄하면서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왔고, 부산도 이와 유사한 불교 흐름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래서 장안사(長安寺)를 중심으로 한 기장 지역은 원효 계통이, 금정산 범어사(梵魚寺)를 중심으로 한 동래 지역은 의상 계통이 그 흐름을 계승하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에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 일대에는 가야 불교의 성격을 보여 주는 사찰 및 유물이 일부 남아 있어 부산 지역 내 각 권역별로 특색 있는 불교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부산이 일본과 가장 근거리에 있기 때문에 범어사는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인식되고 있었다.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변경 지역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왜적을 막으려 하였고, 또한 왜적을 막는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였을 수도 있다. 이는 부산이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입지해 있기 때문에 왜적을 방어하고자 하는 지역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다.

[원효 대사와 동 부산]

부산 지역에서 창건 연대가 확실하고 가장 오래된 사찰은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장안사척판암(擲板庵)이다. 이들 사찰은 673년(문무왕 13) 원효 대사에 의해 함께 창건되었다. 장안사는 처음에 쌍계사(雙溪寺)라고 했다가, 애장왕[800~809]이 다녀간 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척판암의 창건 설화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소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장안성의 종남산 기슭에 있는 운제사라는 절에서 승려 천여 명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는데, 대웅전 대들보가 썩어 무너지게 되자 원효 대사가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옆에 놓여 있는 소반에다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 힘껏 던져 천여 명의 승려를 구하였다. 그 후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자 중국에서 많은 승려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이 머문 산에서 천명의 성인이 나왔다고 한다. 그 산은 지금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천성산(千聖山)이며, 당시 원효 대사가 여덟 자를 적은 소반을 던졌던 곳에 암자를 지어 척판암이라 하였고, 그 아래 큰 절을 세워 장안사라 하였다.

장안사척판암이 창건되었을 때 원효는 모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거사(居士)의 차림으로 경주를 벗어나 전국을 다니면서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었다. 원효는 일찍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할 뜻을 품고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를 향해 갔으나 고구려에서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0년이 지난 뒤 다시 당을 향해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되돌아왔다. 원효는 국내에서 불교의 증진을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의 참뜻을 알리고 불교의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입히기 위하여 교화를 위한 실천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따라서 장안사척판암원효의 화쟁 사상을 반영한 사찰로 창건되었다.

조선 중기에 찬술된 『기장군 읍지(機長郡邑誌)』에 따르면 선여사, 취정사, 안적사, 장안사가 기장의 4대 사찰이라고 한다. 이들 사찰들은 원효가 모두 창건하였고, 동 부산권에 위치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사찰들은 신라 불교 중에서도 원효 계통의 흐름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한다.

한편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위치한 선암사는 본래 이름은 견강사(見江寺)이다. 1867년(고종 4)에 쓴 중수기에 의하면 척판암과 비슷한 시기인 802년(애장왕 3)에 동평현[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성내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675년(문무왕 15)에 원효 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사찰 뒷산 절벽의 바위에서 신라 국선(國仙) 화랑도가 수련하여 선암사라는 이름을 붙여졌다고 한다.

[의상 대사와 범어사]

범어사는 당나라 문종 태화(太和) 19년 을묘 곧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 창건되었다. 여기서 태화 연간은 827년부터 835년까지 9년간이므로 태화 19년은 착오이다. 간지의 을묘는 태화 9년으로 835년(흥덕왕 10)에 해당되며, 범어사의 창건 연대를 이 때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한편 흥덕왕보다 1세기 반이나 앞 시대의 의상 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흥덕왕의 재위 기간이 826년에서 835년까지이므로 702년에 죽은 의상 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의상 대사가 671년에 귀국하여 나라에 화엄 불교를 널리 펴기 위하여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해동 화엄 초조(海東華嚴初祖)가 되었고,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등지에서 화엄의 도리를 전법하였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670년(문무왕 10) 이후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같이 678년에 창건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범어사에는 초창기에 해당하는 석조 유물이나 자료가 없고 의상 단계의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문으로 남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다른 곳에 비정하기도 한다. 결국 범어사는 문무왕 때 소규모 내지는 현재의 위치가 아닌 곳에서 창건되었고, 현존하는 범어사흥덕왕 대에 비로소 대규모 사찰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범어사의상의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던 화엄 십찰의 하나로서,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해동 화엄종의 십찰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신라의 화엄 십찰을 열거하는 중 ‘금정(金井) 범어(梵魚)’라고 하여 그 의미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통일 신라 시대에는 금정산 범어사를 중심으로 의상 계통의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기비사(祇毗寺)와 봉림산파(鳳林山派)]

만덕사지(萬德寺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는 조선 시대 이후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나 최근 발굴과 함께 범어사 못지 않은 중요한 사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덕사지에서 발굴 조사된 기와 유물 가운데 ‘기비사(祇毗寺)’라는 명문이 눈에 띈다. 기비사는 어떤 성격의 사찰일까. 기비사 또는 만덕사가 위치한 만덕 고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현조에 ‘기비현(其比峴)’이라 되어 있다. 기비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김해 지역에는 선종 9산의 봉림산문이 있었다. 봉림산문은 837년에 현욱(玄昱)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高達寺)에서 전법하였다. 그의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審希)가 김해 진례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크게 선풍을 떨치게 되자, 이를 봉림산파(鳳林山派)라고 하였다. 그의 법맥을 이은 자적(慈寂)은 봉림산문을 더욱 융성하게 했는데, 그 영향력은 구포 지역까지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포에서 동래로 넘어가는 기비현, 즉 만덕 고개에 기비사가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야 불교의 전개와 강서구]

가야허황후 설화가 남아 있는 명월사 또는 왕후사(王后寺)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 및 지사동 인근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가야수로왕허황후가 폐백을 드린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명월사(明月寺) 터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명동 마을에 있는 흥국사(興國寺) 주변 일대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8대 질지왕이 즉위하여 다음 해 452년에 시조 수로왕허황후가 합혼(合婚)한 곳에 왕후사를 지어 명복을 빌었고, 절이 생긴 지 500년 뒤 그 자리에 장유사를 세우고 전답 300결을 바쳤다고 한다.

명월사 터 경내에 ‘가락국 태조왕 영후 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가 서 있어 가야 불교의 전개와 관련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5세기경인 452년에 왕후사를 창건한 것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12년인 527년보다도 훨씬 앞서 시기로서 어쩌면 신라 불교의 한 줄기 원류가 가야(伽倻) 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 가야 시대 불교 전래에 대한 논란이 있어 가야 불교의 실체를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부산광역시 강서구 일대의 유물과 사지[절터]를 통해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일정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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