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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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曉 |
영어음역 | Wonhyo |
이칭/별칭 | 서당(誓幢),신당(新幢),원효 대사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63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조원영 |
[정의]
부산 기장 지역 일대의 사찰 창건에 관여한 신라의 승려.
[개설]
성은 설씨(薛氏)이며,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원효(元曉)는 법명(法名)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아버지는 내마(奈麻) 담날(談捺)이다. 아들이 설총(薛聰)이며 손자는 신라 중대 말에 외교가로 활동한 설중업(薛仲業)이다.
[활동 사항]
원효[617~686]는 617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6두품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효가 출가하였던 사찰과 초기 수행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650년 34세의 나이로 의상(義湘)과 함께 현장(玄奘)의 신유식을 습득하고자 당나라 유학을 떠났는데, 해로를 이용하고자 당항진으로 가던 도중, 직산(㮨山)[현 충청남도 천안시]의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으면서 유학을 단념하였다. 여러 선지식들에게 영향을 받은 원효의 무애행(無碍行)은 교단과 세속을 차별하던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교단 운영을 극복하고 교단과 세속이 둘이 아니라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거사 불교(居師佛敎)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교화의 주된 대상은 기존의 불교계로부터 소외당하였던 일반민이었다.
원효의 행적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부산 기장 지역 사찰들의 창건 설화가 모두 원효와 관련되었다는 점이다. 원효는 기장군에 있는 선여사, 취정사, 안적사, 장안사, 옥정사, 척판암 등에 일정 기간 주석하거나 잠시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당시 인근의 범어사(梵魚寺)나 통도사(通度寺) 같은 사찰은 의상 대사(義湘大師)나 자장 대사(慈藏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유독 기장에 남아 있던 4대 사찰은 하나같이 원효의 창건으로 전하고 있다. 원효 계통의 승려들에 의해 기장의 여러 사찰들이 세워지면서 모두 원효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화를 전승시켰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기장군 지역의 사찰들은 이후에도 폐사될 때까지 지역민들에게 정신적 구원처를 제공하면서 원효의 사상적 경향을 면면히 이어 나갔다.
[사상과 저술]
원효 사상의 중심은 일심 사상(一心思想)이었다. 원효의 일심 사상은 원효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원효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원효는 여래장 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해서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확립하였다.
원효의 저서는 그의 사상적 편력만큼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현재 알려져 있는 저서로는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1권[存],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3권[失],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1권[失],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1권[存], 『법화경방편품요간(法華經方便品料簡)』 1권[失], 『법화경요략(法華經要略)』 1권[失], 『법화약술(法華略述)』 1권[失], 『금강삼매경론』 3권[存], 『화엄강목(華嚴綱目)』 1권[失], 『화엄경소(華嚴經疏)』 10권[제3권 存],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失]가 있다.
그리고 『화엄경입법계품초(華嚴經入法界品抄)』 2권[失], 『대승관행(大乘觀行)』 1권[失], 『일도장(一道章)』 1권[失], 『승만경소(勝壇經疏)』 2권[失], 『미륵상하생경기(彌勒上下生經記)』 3권[失], 『유마경종요(維摩經宗要)』 1권[失], 『유마경소(維摩經疏)』 3권[失],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8권[失], 『능가경소(楞伽經疏)』 7권[失], 『능가경요간(楞伽經料簡)』[失], 『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 1권[失],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3권(序存)이 있다.
그리고 『부증불감경소(不增不減經疏)』 1권[失], 『방광경소(方廣經疏)』 1권[失], 『범망경종요(梵網經宗要)』 1권[失], 『범망경소(梵網經疏)』 2권[失], 『범망경약소(梵網經略疏)』 1권[失],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2권(上卷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1권[存],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3권[序·上卷存], 『사분율갈마소(四分律羯磨疏)』 4권[失],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1권[存]이 있다.
그리고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1권[存], 『육현관의발보리심의정의함(六現觀義發菩提心義淨義含)』 1권[失], 『조복아심론(調伏我心論)』 1권[失], 『광백론종요(廣百論宗要)』 1권[失], 『광백론촬요(廣百論撮要)』 1권[失], 『광백론지귀(廣百論旨歸)』 1권[失], 『삼론종요(三論宗要)』 1권[失], 『중관론종요(中觀論宗要)』 1권[失], 『장진론종요(掌珍論宗要)』 1권[失], 『장진론요간(掌珍論料簡)』 1권[失], 『유가초(瑜伽抄)』 5권[失]이 있다.
그리고 『유가론중실(瑜伽論中實)』 4권[失], 『성유식론종요(成喩識論宗要)』 1권[失], 『양섭론소초(梁攝論疏抄)』 4권[失], 『섭대승론세친석론약기(攝大乘論世親釋論略記)』 4권[失], 『섭대승론소(攝大乘論疏)』 4권[失],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4권[存], 『변중변론소(辨中邊論疏)』 4권[失], 『잡집론소(雜集論疏)』 5권[失], 『보성론종요(寶性論宗要)』 1권[失], 『보성론요간(寶性論料簡)』 1권[失]이 있다.
그리고 『인명론소(因明論疏)』 1권[失], 『판비량론(判比量論)』 1권[存], 『인명입정리론기(因明入正理論記)』 1권[失], 『대승기신론소』 2권[存],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 2권[存], 『대승기신론종요(大乘起信論宗要)』 1권[失], 『대승기신론요간(大乘起信論料簡)』 1권[失], 『대승기신론대기(大乘起信論大記)』 1권[失], 『대승기신론사기(大乘起信論私記)』 1권[失], 『기신론일도장(起信論一道章)』 1권[失]이 있다.
그리고 『이장의(二障義)』 1권[存], 『초장관문(初章觀文)』 2권[失], 『이제장(二諦章)』 1권[失],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2권[存],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1권[存],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1권[失], 『구도비유론(求道臂喩論)』 1권[失], 『청변호법공유정론(淸辨護法空有淨論)』 1권[失], 『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失], 『아미타경통찬소(阿彌陀經通讚疏)』 2권[失], 『무량의경종요(無量義經宗要)』 1권[失],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1권[存]이 있다.
또 『무량수경요간(無量壽經料簡)』[失], 『무량수경사기(無量壽經私記)』 1권[失],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存],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 1권[失],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2권[存], 『열반경소(涅槃經疏)』 5권[失], 『반주삼매경소(般舟三昧經疏)』 1권[失], 『반주삼매경약기(般舟三昧經略記)』 1권[失],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1권[存] 등이 있다.
[묘소]
원효가 입적한 후에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빚어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분황사에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