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191 |
---|---|
한자 | 國民保導聯盟虐殺事件 |
영어의미역 | Massacre of the Members of Converted anti-Communist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진 |
[정의]
대한민국 정부가 1950년 6·25 전쟁 초기 좌익 전향 단체인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체포해 집단 학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에서 14연대 군인 반란 사건[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 좌익 세력에 대한 색출에 나섰다. 이를 위해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4월 20일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을 결성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남한 내에 잠복한 좌익 세력을 찾아내고 포섭하기 위해 만든 관변 단체로,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반공 전선에서 첨병 역할을 하였다.
[경과]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면서 간사장 등 일부 직책만 전향자에게 맡기고 총재, 고문, 이사장 등 주요 직책은 법무부, 내무부, 국방부, 검찰, 경찰 등 정부 관리들이 맡아 조직을 관리, 통제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의 성격은 정부가 만든 전향 단체이자 반공 단체이고 법률상 근거가 없는 임의 단체였다.
서울에서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가 결성된 이후 전국적으로 조직 확대 작업이 진행되었다. 부산에서는 1949년 12월 24일 북부산지구가 삼일 극장에서, 남부산지구가 부산역 앞 공회당에서, 중영도지구가 항도 극장에서 각각 결성 선포 대회를 열었다. 동래지구는 이보다 앞선 같은 달 12일 동래 극장에서 선포 대회를 가졌다.
국민보도연맹을 반공 전선에서 전위 조직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 확대가 절실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11월 한 달을 자수 전향 기간으로 설정해 대대적으로 포섭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조직 확대가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좌익 사상과 무관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가입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행정 단위별로 가입자 수가 할당되었고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면장이나 이장 등이 본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임의로 가입시킨 경우도 많았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좌익 전력을 용서해 준다고 회유했고 밀가루 등 양식과 생필품을 주며 가입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의 1949년 11월 19일자 보고서는 “보도연맹 가입자 대다수가 공산주의에 대한 열의가 없는 사람들로, 공산주의자 혹은 그 동조자가 아니면서 단순히 일상의 이득을 취할 생각에, 혹은 좋지 못한 전력이나 혐의를 지울 목적에 전향을 선언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보도연맹 창립 1년 여 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에 파죽지세로 밀리던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을 잡아들이는 예비 검속(豫備檢束)에 들어갔다.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인민군에 동조해 이적 행위를 할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서울 지역에서 일부 국민보도연맹원이 인민재판에 앞장서는 등 동조하는 일이 있었다. 주한미국대사관 3등 서기관 도널드 맥도널드(Donald S. Macdonald)는 1950년 7월 11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보도연맹을 조직한 것은 실수였다”고 평가하였다.
전세가 급박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예비 검속은 1950년 6월말 시작되어 7월 들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기간 부산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 교육이나 마을 공동 작업 등 다른 이유를 들어 한 장소에 모은 뒤 체포했고 소집에 응하지 않는 국민보도연맹원은 경찰이 추적해 잡았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은 경찰서 유치장이나 임시로 만든 구금 시설에 수용되었고 상당수는 부산형무소로 끌려갔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따라 약간씩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내륙에서는 야산 등 외딴 곳에서 총살해 매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부산처럼 바다와 접한 지역에서는 살해한 뒤 바다에 버리거나 산채로 수장하였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 동매산과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부산 터널 위 야산, 현재 골프장이 들어선 동래 컨트리클럽,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장산 골짜기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마을 등이 야산에서 집단 학살이 이뤄진 경우이고, 오륙도와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혈청소 등은 인근 해상에서 학살이 저질러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부산 지역에서 저질러진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가해자로 부산지구 CIC와 부산지구 헌병대, 경찰을 지목하였다.
[결과]
1960년 학살 책임자인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붕괴되자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하였다. 지역별로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국회에도 1960년 5월 27일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전국적으로 피해 신고를 접수받는 한편 지역을 돌며 실태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특위 위원 9명 가운데 4명이 학살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 소속이었고, 민주당 소속 4명 중 경상남도 지역 조사를 책임진 최천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경상남도 지역 경찰 총수인 도경국장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을 좌익 세력 집단으로 간주하여 학살을 용납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 의원으로 특위에 참여했던 박상길은 “특위에 참여한 자유당 의원 중에는 최천 뿐만 아니라 김의택도 경찰 출신이었다. 이들이 특위에 참여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화를 면해 보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이 조사 대상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전쟁이 터지고 그들을 그대로 살려둘 경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면 죽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하였다.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부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에 앞서 민주당 박찬현 의원은 부산 지역 피학살자 수가 1만 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4·19 직후 동래유족회는 회동 수원지 등에서 713구의 유골을 발굴했고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 동매산에서도 160여 명이 사살되는 장면이 지역 주민에 목격되었다.
오륙도와 혈청소 인근 해상에서 수많은 국민보도연맹원이 수장됐지만 바다라는 현장 특성상 인원수를 파악할 수 없다. 부산형무소와 인접한 부산 터널 위에도 수백 명이 암매장되는 모습이 지역 주민에 목격되었다. 구포읍에서는 58명이 살해됐음이 1960년 국회 특위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일부 국민보도연맹원이 수감됐던 부산형무소에서는 몇 명이 살해됐는지 추정조차 힘든 상황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부산형무소 집단 학살 사건으로 최소 1,500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 검속자들이 희생됐다고 종합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동 위원회가 확인 또는 추정한 희생자 수는 부산, 동래를 합쳐 33명에 불과하다.
[의의와 평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방(豫防) 학살이라는 사실이다. 적대 세력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단순한 가능성만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정부가 자국민을 집단 학살했다는 것 또한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특징 중 하나다.
국민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 내 좌익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남한 내 좌익 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반공 정책의 첨병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을 빨갱이 집단, 구성원은 적대 세력으로 간주해 살해하였다. 국민보도연맹에는 공산주의 사상과는 무관한 사람이 대다수였음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감행하였다. 인민군 비점령 지역이라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부산과 경상남도에서 특히 피해가 컸다.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등을 조사하기 위해 2005년 12월 1일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 목적과 달리 정치적, 이념적 논리에 휘말리면서 1960년 국회 특위에 이어 또다시 진상 규명에 실패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여전히 미완의 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