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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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刑務所在所者虐殺事件 |
영어의미역 | Massacrre of Busan Prison inmat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진 |
[정의]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이 집단 학살된 사건.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난 뒤 전선이 낙동강까지 급속히 밀리면서 전국에서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부산형무소도 대구형무소, 마산형무소, 진주형무소 등 다른 형무소에 수감됐던 재소자들이 대거 옮겨 오면서 평소 2,000명 수준이던 재소자 수가 9월 5,900명까지 늘어났다. 재소자 중에는 「국방경비법」, 「육군형사법」 등을 위반해 수감된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형을 선고받거나 재판 중인 민간인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쟁 발발 직후 예비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도 상당수 있었다.
[경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정부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거나 야산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살해하였다. 당시 부산형무소 간수였던 부산의 김 모[2002년 증언 당시 77세]씨는 “보도연맹원과 같은 사상범 처리가 최우선이었다. 심지어 사상범을 가둬둘 공간이 부족하자 일반 범죄자들을 그냥 풀어주기도 했다”고 말하였다. 김 모는 특히 “보도연맹원은 군인들이 관리했고 일주일 동안 밤마다 100~200명 씩 끌고 나간 적도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였다. 간수였던 박 모[2001년 증언 당시 83세]씨는 “보도연맹원들이 미결수 사동에 갇혀 있었는데 헌병들이 문을 열어 앞쪽에 있는 사람부터 닥치는 대로 끌어내 죽였다”고 증언하였다.
국군 3사단 군사고문단 소속 롤링스 에머리치(Rollings S. Emmerich)의 「1950년 한국 전쟁 초기의 역사」란 제목의 비망록에는 당시 부산형무소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국군 3사단 23연대장 김종원의 군사 고문이었던 제널드 푸트만(Gerald Putman) 대위는 1950년 7월 1일 김종원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3,500명을 한꺼번에 살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군사고문단은 김종원에게 집단 학살을 감행할 경우 유엔(UN) 감시단에 보고하겠다고 경고해 이를 저지하였다.
하지만 사흘 뒤 대구형무소에서 하루 1,500명씩, 3일간 4,500명의 좌익 재소자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졌고 미군사고문단은 대구로 급히 달려가 이를 막았다. 하지만 이후 두 형무소에서는 집단 학살이 저질러졌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형무소 학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1950년 부산형무소 재소 인원 일표(在所人員日表)가 주목된다. 이 일표는 1950년 1월부터 11월까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 수를 하루하루 기록해 둔 일지(日誌)로, 인원 변동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표에서 특히 주목되는 날은 9월 25~26일이다. 25일 부산형무소에는 일지를 통틀어 가장 많은 5,90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26일 1,460명이 갑자기 줄었다. 당시 전황을 볼 때 부산형무소에서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감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기간 대구형무소, 마산형무소에 근무했던 간수들은 부산형무소에서 재소자를 넘겨받은 적이 없다고 일치된 증언을 하였다.
[결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11월 7일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에 대해 직권 조사 개시 결정을 내린데 이어 2009년 2월 2일 부산형무소 재소자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부산형무소에서 1950년 7월 26~30일, 8월 2~3일, 9월 25일 3차례에 걸쳐 최소 1,500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 검속자가 희생되었고 그중 148명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소자 대다수가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학살의 주체와 관련해 형무소에 상주하고 있던 부산지구 CIC와 부산지구 헌병대, 부산 지역 경찰을 지목하고 이들이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 동매산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장산 골짜기에서 집단 총살하거나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했다고 확인하였다.
부산형무소에서 집단 학살이 진행될 당시 근무했던 간수들은 보도연맹원은 군이 모든 것을 직접 관리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는 부산형무소 재소 인원 일표에 보도연맹원 수는 포함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밝힌 희생자 수는 실제 피해 규모의 일부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1950년 9월 말께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학살이 중단된 것은 남한에서 제네바 협약 준수 여부를 감시하던 국제적십자 단원들의 강력한 경고가 있었고 영국, 미국 등 해외 언론의 거센 비난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 간수였던 박씨는 “9·28 서울 수복 무렵 경상남도청 뒤에 있던 대통령 관사에서 죽이는 것을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었다”고 회상하였다. 박씨는 “트럭 몇 대에 사람들을 포박해 실어놓은 상태에 그 전화가 왔고 그 사람들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은 대전형무소, 대구형무소 집단 학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학살 사건 중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구체적인 윤곽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특히 학살의 책임 문제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이를 직접 지시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를 했지만 5년 남짓한 활동 기간 동안 형무소 집단 학살 사건을 포함해 9,980건[진실 규명 8,187건]에 달하는 민간인 희생 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산형무소 학살과 관련해 군통수권을 갖고 있던 미국의 책임 문제도 연구 과제이다.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학살 행위와 관련해 G2 등 일선 첩보 부대에서 수많은 보고를 받았지만 이를 ‘내정 문제’로 규정해 외면했고 결국 학살 행위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