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임진 동래 유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413
한자 壬辰東萊遺事
영어의미역 Record of Dongnae in the Imjin Year
이칭/별칭 『임진 유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저자 민정중
저술 시기/일시 1668년 1월 27일연표보기 - 민정중이 저술
소장처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민정중(閔鼎重)이 부산 지역의 임진왜란에 관하여 쓴 유사.

[저자]

민정중의 호는 노봉(老峯)으로, 1658년 8월부터 1659년 3월까지 동래 부사를 맡았다. 『임진 동래 유사(壬辰東萊遺事)』민정중이 함경 감사를 재임한 후에 쓴 것이다.

[편찬/간행 경위]

민정중이 함경 감사로 재직할 때, 동래부의 부로(父老)가 찾아와서 “지금의 동래 부사 안진(安縝)[1664년 윤4월에서 1666년 9월까지 재임]이 당대의 문장가에게 글을 청하여 신하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므로, 그때 기록한 것을 얻어서 증거로 삼으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민정중은 의(義)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 동래 부사 재임 당시를 비롯해 본인이 전에 써둔 초고를 약간 수정하여, 부로들에게 답하기 위하여 『임진 동래 유사』를 지었다.

[형태/서지]

민정중의 문집인 『노봉집(老峯集)』 권10 잡저(雜著)에 「임진 유문(壬辰遺聞)」, 『충렬사지(忠烈祠志)』 권6 시향록(始享錄)에 「임진 동래 유사」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임진 동래 유사』의 구성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임진왜란 당시의 부산진성 전투와 동래성 전투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둘째는 동래 부사로 재임할 당시에 본인이 진행한 임진왜란 현창 사업에 대한 기록이다. 셋째는 이 유사[유문]를 짓게 된 직접적인 경위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비장 송봉수(宋鳳壽)·김희수(金希壽), 향리 송백(宋伯),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 겸인 신여로(申汝櫓), 동래부민 김상(金祥), 동래 향교 교수 노개방(盧盖邦), 유생 문덕겸(文德謙)·양통한(梁通漢), 관노 철수(鐵壽)·매동(邁同) 등의 전투 상황 등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송상현정발은 조정에서 추모하고 사당을 세우는 등 표창을 하였지만, 노개방이나 김상 등 나머지 의사와 열녀의 공로는 백년이 되지 않아 모두 소멸되어 전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널리 캐묻고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 것을 구하여 1통의 기록을 만들고, 새길 돌을 구하여 사적(事蹟)을 싣고, 수 칸의 집을 관도(官道) 옆에 세워 화공(畵工)을 시켜 그 자취를 그리게 하였다. 그런데 돌은 채취하였으나 병으로 인하여 파직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1668년에 송시열(宋時烈)이 쓴 「충렬비기(忠烈碑記)」에는 “1658년(효종 9) 민정중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 일을 물어보니, 노인으로서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이와 같았다. 병사 이각의 도망가는 모습을 나타내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사는 임진왜란 후의 경험적 기억을 토대로 하여 쓰인 자료이다. 화공을 시켜 그린 그림에는 이각의 도망가는 장면을 묘사하게 하였다.

『여산 송씨 지신공파보』[1957]에 “민정중이 순절도 3폭을 그려, 1폭은 조정, 1폭은 본인, 1폭은 송상현 종가가 소장했다.”라고 하였다. 그림의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부산 지역의 임진왜란 전투 상황을 시각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부산 지역 고로(古老)들의 기억의 전승이 사료화된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