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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370
한자 草梁客舍
영어의미역 Choryang Guesthou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226번길 15[영주동 582-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객사
건립 시기/일시 1678년연표보기 -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86년 - 전패를 다대포로 옮김
개축|증축 시기/일시 1718년연표보기 - 수리
개축|증축 시기/일시 1734년연표보기 - 중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5년연표보기 - 외삼문 개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정청·동헌·서헌·내삼문·외삼문·객사 담장·좌우 계단 중수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 226번길 15호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에 있는, 조선 후기 일본 사절이 조선 왕에게 숙배례를 거행하던 장소.

[개설]

조선 전기 일본과의 외교는 궁궐과 일본 사절의 숙소인 서울 동평관(東平館)에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외교 문서와 예단, 회답 문서와 회례품(回禮品)이 오갔다. 조선 후기에는 일본인의 상경(上京)이 금지되자 일본과의 외교는 모두 부산[동래]에서 이루어졌다. 사절이 도착하면 우선 조선 국왕에 대해 예의를 표하고, 인사를 올리는 곳이 필요하였다. 두모포 왜관 때는 부산진성 안의 부산진 객사(釜山鎭客舍), 초량 왜관 때는 초량 객사(草梁客舍)에서 거행하였다.

조선 시대 객사는 모든 군현에 설치되어 있었고, 건물 중앙에 전패(殿牌)를 두었다. 전패는 국왕을 상징하는 패이므로, 전패가 있는 건물은 좌우에 익랑(翼廊)을 갖추되 익랑보다 높게 세웠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해당 지역의 수령과 관리들이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에서 절을 올리는 장소이면서 지방을 오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초량 객사도 건물의 모습은 다른 객사와 거의 동일하였는데, 객사를 주로 사용하는 이들은 일본 사절이었다. 일본 사절이 오면 동래 부사, 부산진 첨사, 서울과 경상도에서 파견되는 경(京)·향(鄕) 접위관(接慰官) 등이 이들을 맞이하고 외교 의례를 수행하였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1802년 초간]의 왜사 숙배식(倭使肅拜式)에는 “별차(別差)[조선인 역관]가 일본 사절인 정관(正官) 이하를 이끌고 객사에 이르러 대문 밖에서 말을 내려 서쪽 협문으로 들어와 서쪽 뜰에 이르러 서면, 동래 부사와 부산진 첨사는 모두 흑단령(黑團領)[관복의 일종]을 입고 객사 안으로 나아가 동쪽 벽에서 서쪽을 향해 두 손을 마주 잡고 서고, 훈도(訓導)[조선인 역관]와 별차는 역시 흑단령을 입고 서쪽 벽에서 동쪽을 향하여 선다. 예방(禮房) 소속 아전이 전패를 열고 촛불을 사르고 향을 피운다. 뜰의 동서에 의장(儀仗)을 배열하고 계단 위에 홍산(紅傘)[붉은색 큰 양산]을 설치한다. 소통사(小通事)가 나누어 서서 [일본어로] 말을 전달하면 정관 이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끝난 뒤에 연향청에 돌아오면 하선연을 베풀어 준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동래 부사, 부산진 첨사, 조선인 역관 등은 모두 객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있고, 일본 사절은 객사 마당에서 전패를 향해 절을 올렸다. 객사에 배열된 의장은 동래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재임할 때인 1740년(영조 16)에 크게 수리·보완하였다. 의장의 종류는 노주 명주로 만든 홍량산[潞洲紬紅凉傘] 1자루, 꽃무늬 명주로 만든 청개[花紬靑慨] 1쌍, 능주로 만든 홍개[綾紅蓋] 1쌍, 붉은 비단으로 만든 작선[紅紗雀扇] 1쌍, 은부(銀斧) 1쌍, 은립과(銀立瓜) 1쌍, 금등(金燈) 1쌍, 금횡과(金橫瓜) 1쌍, 은장도(銀粧刀) 1쌍, 금장도(金粧刀) 1쌍이었다. 객사에서의 의례를 마친 후에 비로소 조선 도착 환영연이라고 할 수 있는 연향이 베풀어졌다. 이러한 의례 모습은 19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객사의 위치는 초량 왜관 동쪽 약 1.2~2㎞[3~5리]에 있었다. 변박(卞璞)의 「왜관도(倭館圖)」[1783]를 보면 왜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있는 건물이므로, 일반 공공건물처럼 건립과 동시에 그 주변 경관이 함께 조성되었다. 객사를 세우고 소통사, 관지기[館直], 사기 창고지기[沙器庫直], 객사지기[客舍直] 등 두모포 왜관에 있던 모두 44채의 건물을 객사 주변으로 옮겼다. 또한 객사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 주변에 조선인 민가도 옮겼다. 18세기 초에 이미 민가가 70~90호에 이르러 초량 객사를 중심으로 초량촌(草梁村)이 발전하였다.

[위치]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 226번길 15호 봉래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초량 객사가 있었다.

[변천]

초량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가 있는 건물이므로 건물의 변형, 훼손, 퇴락 등을 방지하기 위해 자주 수축, 증축, 개축을 하였다. 1678년(숙종 4) 신축 후 적어도 아홉 차례 넘게 수리 공사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변례 집요(邊例集要)』 관우(館宇)조에는 1718년(숙종 44) 객사를 수리하였다고 하고,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동래 부사 최명상(崔命相) 때인 1734년(영조 10)에 초량 객사를 중창(重創)하였다고 하며,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草梁客舍外三門改建謄錄)』에는 1825년(순조 25)에 객사 외삼문(外三門)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초량 객사 중수 등록(草梁客舍重修謄錄)』[1873]에는 1873년(고종 10)에 대대적인 객사 공사를 하였는데, 정청(正廳)·동헌(東軒)·서헌(西軒)·내삼문(內三門)·외삼문·객사 담장·좌우 섬돌과 계단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왜관의 기능을 잃어 가던 시기에도 수리한 이유는 객사가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위신을 높게 보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초량 객사는 1876년(고종 13) 근대 개항 이후 더 이상 일본 사절의 숙배례(肅拜禮) 장소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881년(고종 18)에 일본인이 그렸다는 「포산항 견취도(浦山港見取圖)」에는 ‘구외청(舊外廳)’이라고 표기되고 있고 정청과 대문이 그려져 있다. 또한 1883년(고종 20) 감리서[本署]가 두모진에 설치되었는데, 업무가 증가하면서 감리분서가 생겼다. 1892년 감리본서와 감리분서가 합치면서, 감리서가 초량객사 부지로 옮겨왔다.

감리서의 서기(書記) 민건호(閔建鎬)가 쓴 『해은 일록(海隱日錄)』 1886년 5월 7일 일기에는 다대포로 객사의 전패를 옮겨 봉안하는데, 이날 우선 용정자(龍亭子)[나라의 보배 등을 실어 나를 때 사용하는 가마]와 의장을 철거하였다고 한다. 초량 객사의 전패가 옮겨지고 난 후, 객사의 옛 건물은 부산 감리서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 후 부산 감리서가 문을 닫은 뒤 초량 객사 터는 부산지방재판소, 공립 부산보통학교로 사용되다가, 오늘날 봉래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봉래초등학교에는 초량 객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2003]이 세워져 있다.

[형태]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증정교린지』 관우조에는 정청 및 동헌·서헌 44칸, 중문(中門) 3칸, 좌우 익랑 2칸, 외삼문 3칸이며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춘관지(春官志)』[18세기 중반 간행]에는 24칸이라고 하였고, 『동래부지』에는 33칸에 대문 3칸, 중문 3칸을 갖추었다고 한다. 『초량 객사 중수 등록』에는 정청 13칸, 동헌 15칸, 서헌 15칸, 중문 6칸, 좌우 익랑 4칸, 외대문 9칸으로 전체 64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은 기록할 때의 오류도 있겠지만 1678년 신축된 이후 수리와 증축이 계속된 데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초량 객사는 일반 군현에 소재한 객사와 달리 일본 사절이 조선 국왕에게 숙배례를 올리던 건물이었던 점에서 전국에서 유일한 건물이다. 객사를 중심으로 초량촌이 조성되고 일반민들이 거주하면서 일본인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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