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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 객사 중수 등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40
한자 草梁客舍重修謄錄
영어음역 Choryang Gaeksa Jungsu Deungrok
영어의미역 An Outline of Choryang Guesthous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예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편자 동래부
권책 1책
규격 39.8×24.6㎝
저술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저술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4년 - 영인 발간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599
간행처 국사편찬위원회 -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정의]

1873년 부산 초량 객사의 수리 공사 과정을 기록한 책.

[개설]

임진왜란을 계기로 왜사(倭使)의 상경(上京)이 금지되자, 일본 사신들은 부산에 설치된 왜관을 통해 외교 및 통상 업무를 이행하였다. 부산 왜관은 절영도 임시 왜관에서 두모포 왜관을 거쳐 초량 왜관으로 이건(移建)되었는데, 초량 왜관이 창건되면서 왜사숙배(倭使肅拜)를 위한 공간으로 초량 객사가 건축되었다. 왜사숙배란 상경 금지령 때문에 직접 조선 국왕을 알현할 수 없는 일본 사신들이 왜관 인근에 설치된 객사에서 조선 국왕의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한양의 궁궐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예식이다.

초하루·보름날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거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숙소로 사용되던 일반 영읍(營邑)의 객사와는 달리, 초량 객사는 일본 사신들의 숙배례를 위해 전용(專用)되었다. 따라서 이 시설은 중요한 외교 시설이었기 때문에, 초량 객사의 수리 상황이 상세히 보고되었고, 흉년이 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즉시 수리가 거행되었다.

초량 왜관 인근에 배치되어 훈별청(訓別廳)·출사청(出使廳) 등의 건물과 이웃하였기 때문에, 초량 공해(草梁公廨)로 분류되었던 초량 객사초량 왜관의 운영과 함께 약 200년간 존치되면서 여러 번 수리되었다. 수리 공사의 가장 첫 단계인 건물의 훼손을 판단하는 일은 왜관 수리의 감독을 겸하던 일본어 통역관인 감동 역관과 훈도·별차에 의해서 이루어져 동래부에 보고되었다. 수리 공사의 전 과정과 소요되는 재료 및 자금에 대한 사항은 동래 부사의 공문서(公文書)를 통해 모두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이 기록은 1873년 수리 공사에 보고된 공문서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편찬/간행 경위]

『초량 객사 중수 등록(草梁客舍重修謄錄)』은 1873년 초량 객사의 중수 공사 전(全) 공정을 관리하고 공사에 소요되는 재료와 공사 기술자의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동래부를 거쳐 조정에 보고되거나 유향소 등으로 유통된 공문서를 정리하여 수록한 책이다.

[형태/서지]

『초량 객사 중수 등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규 18136]은 필사본으로, 1책 38쪽[표지 포함]이며, 1825년 초량 객사에 부속된 외삼문의 수리 공사를 기록한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草梁客舍外三門改建謄錄)』과 함께 2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크기는 39.8×24.6㎝로, 1873년 초량 객사의 수리 과정에 유통된 공문을 토대로 동래부가 간행한 것이다. 원본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외에, 원본을 탈초하여 간행한 『각사 등록(各司謄錄)』13권[국사편찬위원회, 1984]에도 508쪽에서 515쪽에 걸쳐 같은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구성/내용]

1873년 7월부터 8월까지 건물의 수리를 위해 전패를 옮겨 공사에 착수하고 수리를 마친 후 다시 정비된 객사에 전패를 모셔오는 일련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동래부는 감영에서 조정으로 이어지는 관치 기관과 유향소에서 각 면(面)으로 이어지는 자치 기관 사이에서 문서를 유통하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그 사이에서 통용된 보장(報狀)[상부 관아에 보고하던 문서]·이문(移文)[같은 등급의 관아 사이에서 주고받던 공문서]·등보(謄報)[보고하기 위해 원본을 베낀 문서]·사통(私通)[공무에 관하여 관원끼리 사사로이 연락하기 위해 작성한 편지] 등의 공문서를 『초량 객사 중수 등록』에 수록하였다.

공사의 시작과 종료나 전패의 봉안(奉安) 등에 관련된 국가적 행사를 상부에 보고하는 용도로 장계(狀啓)[지방에 파견된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보장(報狀)[어떤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보고하기 위한 문서] 등의 문서가 보고되었으며, 공사 진행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얻기 위해 자치 기관에는 전령(傳令)[명령이나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고시(告示)]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유통된 공문서에는 당시 수리 공사에 참여한 공사 감독관의 구성과 64칸의 객사가 수리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목수·석수 등의 장인 명단 및 급료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나무를 벌목하거나 단청을 칠하고 기와를 덮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건축 내용 외에 조선 국왕의 상징인 전패를 이안하고 봉안하기 위해 호위하던 시위대의 도식(圖式)이 첨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초량 객사는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 시설로서, 조선 후기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의의를 가진 건축물이다. 유구(遺構)가 남아 있지 않아 건축의 형태나 건축 활동의 과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가운데,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초량 객사 중수 등록』초량 객사의 건축 구조를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두 도서를 제외하고는 객사와 이웃하여 왜관 주변에 설치되었던 초량 공해의 건축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므로, 『초량 객사 외삼문 개건 등록』『초량 객사 중수 등록』에서 묘사된 초량 객사 수리 공사 과정은 초량 왜관 주변 조선 관아의 건축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초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1873년에 일어난 초량 객사의 수리 과정을 기록한 『초량 객사 중수 등록』에는 객사의 정청과 동·서헌 등의 주요 건물, 내삼문·외삼문·담장 등의 부속 시설과 돌층계를 포함한 정비 공사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초량 객사의 건축 규모를 상정할 수 있다. 또한 동래부의 자치적 행정 체계를 통해 수리 공사의 기술자와 인부, 물자와 재료를 마련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술되어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 및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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