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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252
한자 武愍祠
영어의미역 Muminsa Shrine
이칭/별칭 최영 장군 사당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1동 46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연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당
양식 팔각지붕
정면칸수 4칸
측면칸수 4칸
소유자 무민사보존위원회
관리자 최병선[051-632-7721]
훼철|철거 시기/일시 1939년연표보기 - 일본군에 의해 철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무민사보존위원회가 중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7년 - 최영의 공덕을 기리는 정민비 건립
현 소재지 무민사 -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1동 467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1동에 있는 조선 전기 최영(崔瑩)의 사당.

[개설]

무민사(武愍祠)최영[1316~1388]의 시호를 딴 사당으로, 1397년(태조 6) 태조는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의 넋을 위로하였다. 무민사가 소재한 남구 감만동의 옛 이름은 감만이포(戡蠻夷浦) 또는 감만이(戡蠻夷)였다. ‘감만’ 또는 ‘감만이’라는 뜻은 ‘오랑캐를 쳐서 이긴다’로 풀이되며, 여기서 오랑캐란 곧 일본을 지칭한다. 고려 말~조선 초 왜구(倭寇)가 우리나라 해안가에 빈번하게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을 때 감만 지역에도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부산포 해전 당시 왜적을 감만 지역으로 유인하여 전멸시킨 바 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 침입을 대비하여 감만포에 ‘경상 좌도 수군절제사영’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무민사가 위치한 남구 감만동 일대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남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지역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고려 말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최영을 용맹한 장수로 받들고, 고려 왕조 마지막 충신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담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신앙심으로 승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무민사 철거 당시에 일본군이 제당(祭堂)을 철거하고 나무를 베어 버렸는데, 철거한 지 3일 만에 일본군 부대장 중위 와타나베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위치]

무민사부산광역시 남구 감만1동의 주택가 한복판에 위치한다.

[변천]

무민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민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일본군에 의해 불타 버렸다. 이후 8·15 광복 후 무민사 터에서 매년 음력 4월 20일에 제향을 올리다가, 1968년에 무민사보존위원회가 최영의 영정과 신위를 봉안한 사당을 재건하였다. 1977년에는 최영의 공덕을 기리는 유적비 정민비를 세웠다.

[현황]

현재 무민사의 소유자는 무민사보존위원회이고, 관리자는 최병선이다. 주택가 골목 안의 개인 주택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방문 시 사전에 전화를 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무민사에 걸린 최영의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현재 무민사에서는 고려 말기에 감만이포[현 남구 감만동]에 출몰한 왜구를 격퇴한 최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 왕조의 충신이자 용맹한 장수였던 최영에 대한 일반인들의 흠모와 존경이 일종의 신앙심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무민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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