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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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瑩 |
영어음역 | Choe Yeong |
이칭/별칭 | 무민(武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무민사로 17[감만동 418]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은정 |
[정의]
부산 무민사에 배향된 고려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동주(東州).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사헌규 정(司憲糾正)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지씨(智氏)이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서녀는 우왕(禑王)의 두 번째 부인인 영비 최씨(寧妃崔氏)이다.
[활동 사항]
최영(崔瑩)[1316~1388]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과 우왕 대에 활동한 무신이다. 공민왕 때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자주 토벌하여 그 공으로 우달치(于達赤)[임금을 호위하던 숙위군]가 되었다. 이후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고, 배원 정책에 따라 원나라 속해 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여 파사부 등 3참을 확보하였다. 최영은 1357년(공민왕 6) 400여 척의 배를 몰고 오예포[현 황해도 장연]에 쳐들어온 왜구를 몰아내고, 1365년(공민왕 14) 동서강도 지휘사가 되어 교동, 강화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왜구 및 홍건적의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양광 전라도 왜구 체복사, 서북면도 관찰사, 양광도 진변사 등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 윤으로 강등되고, 귀양을 갔다가 신돈이 처형된 뒤 복귀하여 찬성사가 되었다.
특히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1376년(우왕 2) 연산 개태사, 1377년 강화, 통진, 1378년 승천부[현 경기도 개풍] 등에 쳐들어왔다. 최영은 그때마다 출정하여 왜구를 무찔렀다. 그 공으로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지고, 해도 도통사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문하시중에 올라 임금의 밀령을 받아 전횡을 일삼던 권신 염흥방(廉興邦), 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같은 해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최영은 팔도 도통사가 되어 좌군 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 도통사 이성계(李成桂)에게 요동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峯縣)[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 합포(合浦)[현 마산], 충주로 옮겨졌다가 개경으로 압송되어 그해 12월 참수되었다.
[묘소]
최영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에 있으며,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묘이다. 위쪽에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381년(우왕 7)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아버지 최원직은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판문하사(判門下事)·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동원 부원군(東原府院君)에 증직되고, 어머니 지씨는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 칭호를 받았다. 1397년(태조 6)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민(武愍) 시호를 내렸다.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있는 최영의 사당인 무민사에서 매년 4월 20일 제향하고 있다. 무민사는 일제 시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8년 재건되었고, 1977년 경내에 공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