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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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沙下區-文化遺産 |
영어의미역 | Cultural Assets of Saha-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선사 시대부터 근대까지 부산광역시 사하구의 주요한 문화유산.
[개설]
부산광역시 사하구 지역의 문화유산은 선사 유적, 분묘, 관방 유적, 관아(官衙) 및 누대(樓臺)로 분류할 수 있다. 선사 유적으로는 다대포 조개더미[多大浦貝塚]·신평동 조개더미[新平洞貝塚]·괴정동 조개더미[槐亭洞貝塚]·하단동 조개더미[下端洞貝塚]가 있으며, 분묘로는 감천동 고인돌[甘川洞支石墓]와 괴정동 고분군(槐亭洞古墳群)이 있다. 관방 유적으로는 다대포 성터[多大浦城址]와 목장성 터[牧場城址], 제석곶성 터[帝釋串城址], 응봉 봉수대(鷹峯烽燧臺), 윤공단(尹公壇)[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 정운공 순의비(鄭運公殉義碑)[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 다대 첨사영 갑주(多大僉使營甲胄)[부산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2호] 등이 있으며, 관아와 누대로는 다대진 동헌(多大鎭東軒)[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호]과 몰운대(沒雲臺)[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가 있다.
[선사 유적: 조개더미]
사하구 지역에 형성되었던 조개더미[貝塚]로는 다대포 조개더미·신평동 조개더미·괴정동 조개더미·하단동 조개더미가 있다. 다대포 조개더미는 낙동강 하구의 다대포 해수욕장과 몰운대 입구 사이에 있었던 조개더미이다. 1934년에 일본 학자들이 최초로 채집하고 소개하였으며, 1966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채집된 유물들은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다대포 조개더미가 있던 자리에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현재 유적은 소멸된 상태이다.
신평동 조개더미는 지금의 사하구 신평동의 고명(古名)인 망후촌의 앞 작은 구릉인 속칭 ‘조개 모래’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적갈색 연질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철기 시대의 조개더미로 보인다.
괴정동 조개더미는 사하구 괴정동 산기슭의 괴목(槐木) 주변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주택이 들어서서 자취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본래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였다가 1978년에 해제되었다. 괴정동 조개더미는 1929년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당시 채집된 토기 편 등의 유물은 해방 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입수하여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출토 유물은 김해식 토기 편과 회청색 토기 편, 적갈색 토제 방추차 2개, 완형 접시 1점, 간 돌도끼[마제 석부], 민무늬 토기[무문 토기] 편 등이 있다.
하단동 조개더미는 사하구의 하단과 신평의 중간 지점 강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거의 유실, 파괴된 상태이다. 하단동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조개더미 밑 갈밭이 있는 늪지대에서도 김해기의 토기 편들이 출토되었다.
[분묘]
사하구에 있는 분묘로는 감천동 고인돌과 괴정동 고분군이 있다. 감천동 고인돌은 사하구 감천동 562번지에 모두 6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전소 건설 및 도로 공사 등으로 파괴되었다. 감천동 고인돌에는 남방식 고인돌와 굄돌[지석]이 없는 변형적 고인돌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주변에서 돌절구, 돌도끼, 돌대패날, 돌끌, 땅을 파는 데 사용하는 흠이 팬 돌도끼 등의 간석기[마제 석기]와 민무늬 토기 편, 쇠뿔 모양의 우각형 손잡이가 출토되었다.
괴정동 고분군은 구덕산의 남쪽에 있는 완경사의 낮은 구릉인 사하구 괴정동 1026-32번지에 위치한다. 이 일대는 원래 대규모의 고분 지대였으나 지금은 주택지로 바뀌었다. 괴정동 고분군은 1975년에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여 20x40m 범위의 발굴 지역 내에서 3~4m 간격으로 39기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무덤은 돌덧널무덤[석곽묘] 29기와 독무덤[옹관묘] 10기의 두 종류였다. 출토 유물은 토기가 270점, 철기가 300점, 치레걸이가 30여 점이었다. 토기는 대부분 신라계 토기였으며 사하구 지역의 재래 요소는 극히 적었다. 철기는 고리 손잡이 큰 칼, 재갈, 낫, 창, 살촉들이었으며, 치레걸이는 금제 또는 금동제 귀걸이와 곡옥(曲玉) 유리구슬들이었다.
[관방 유적]
사하구 지역은 우리나라 남방 경계 지역에 위치하여 전략상 주요 거점 지역에 해당된다. 관방 유적은 성터 유적으로서 다대포 성터, 목장성 터, 제석곶 성터가 있으며, 통신 시설인 응봉 봉수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의 사당인 윤공단, 장군 정운(鄭運)의 순절비인 정운공 순의비, 그리고 다대 첨사영 갑주 등이 있다.
1. 다대포 성터
다대포 성터는 지금의 다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다대진성(多大鎭城)은 1490년(성종 21) 11월에 축조되는데, 그 규모는 둘레가 547.27m[1,806척], 높이가 3.94m[13척]였다. 성이 축조되기 전에도 보(堡)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규모는 둘레가 393.33m[1,298척], 동서의 길이가 109.09m[360척], 남북의 너비가 73.94m[244척]였고, 보 안에 샘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성종 때 축성한 성은 임진왜란 이후 허물어졌을 것이고, 그 뒤 다시 수축한 성은 수군영이 1895년(고종 32)에 혁파되기 이전까지는 존속하였다. 일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주거지 신축과 도로 개설 등으로 점점 자취를 잃어 가고 있다.
2. 목장성 터
목장성 터는 목마장을 둘러싼 성터로, 부산 지역에는 세 곳에 석축의 목장성(牧場城)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대포에서 석성산에 이르는 약 4㎞[10리] 규모의 목장성이다. 지금 사하구 괴정동 뒷산에 그 일부가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두께 2.42m[8척]에 높이 2.42~3.64m[8~12척]로 지형에 따라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3. 제석곶성 터
제석곶성(帝釋串城)은 본래 승악산(勝岳山)으로 불렸던 지금의 승학산(乘鶴山) 아래에 석성으로 축조되었는데, 1510년(중종 5)에 발생한 삼포왜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이후 복구되지 않았다. 제석곶은 기우제를 올리던 사당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여기에 석성을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응봉 봉수대
응봉 봉수대는 지금의 사하구 다대동 북쪽의 아미산에 있으며, 고려 시대부터 사용되었던 통신 시설이다. 봉수 조직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다음 연락지인 구봉(龜烽)까지는 약 10㎞[25리]였다. 1977년에 수축하였으며, 2009년 12월에 봉수대 모형[높이 4.5m, 직경 4~2.8m]을 만들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5. 윤공단
윤공단은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사하구 다대동 123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다대 첨사 윤흥신, 그리고 윤흥신과 함께 순사(殉死)한 군민(軍民)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제단이다. 1762년(영조 38) 경상 관찰사 조엄(趙曮)이 조정에 그 포상을 건의하였고, 4년 뒤인 1766년(영조 42)에 다대 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 객관의 동쪽에 윤공단을 설치하여 매년 4월 15일에 제사 지냈다. 원래 윤공단은 다대포 첨사영(多大浦僉使營)의 성내(城內)인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1970년 12월 5일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비석 앞면에는 ‘첨사 윤공흥신 순절비(僉使尹公興信殉節碑)’가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윤흥신의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
6. 정운공 순의비
정운공 순의비는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으며, 사하구 다대동 산144번지 몰운대에 위치하고 있다. 정운공 순의비의 주인공인 정운은 임진왜란 때 전라 좌도 녹도 만호(鹿島萬戶)로 있으면서 이순신(李舜臣)의 우부장(右部將)이 되어 부산포 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1798년(정조 22)에 정운의 8세손 정혁(鄭爀)이 다대포 첨사로 부임하여 몰운대에 정운의 공덕을 추모하는 순의비를 세웠는데, 비면에는 ‘충신 정운공 순의비(忠臣鄭運公殉義碑)’ 여덟 자를 새겼고, 비 뒷면에는 18행으로 정운의 순절 사적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7. 다대 첨사영 갑주
다대 첨사영 갑주는 2004년 5월 8일에 부산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다대 첨사 윤흥신의 제향 때 제복(祭服)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으나, 실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전투복과 예복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 현 다대초등학교 내에 있었던 다대포 첨사영을 몰운대로 이전 복원할 때 발견되어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1978년부터 충렬사(忠烈祠)에 보관되고 있다.
[관아 및 누대]
다대진 동헌(多大鎭東軒)은 사하구 다대동 산144번지 몰운대에 위치하며, 1972년 6월 22일에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홑처마 지붕으로, 안두리기둥 위에 절단된 대들보를 놓은 5량 집이며 벽이 없다.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25년(순조 25)에 중수되어 지금에 이른다. 본래 다대진성이었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으며, 1980년에는 기둥과 마루를 보수하고 단청 공사와 현판을 설치하였다.
지금까지 다대진 동헌(多大鎭東軒)은 다대포 객사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객사는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배(望拜)를 드리는 데 사용되거나,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다대포에 객사가 건립된 것은 이곳이 다대진으로서 정3품 당상관인 수군첨절제사가 파견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부산 지역에는 다대포 객사 외에 조선 시대 객사로서 동래부(東萊府)의 봉래관(蓬萊館), 부산진성의 공진관, 경상 좌수영의 영파당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져 다대포 객사가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객사 건축물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2020년 7월 부산광역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다대포 객사는 다대진 동헌(多大鎭東軒)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 몰운대
몰운대는 낙동강 하구의 최남단 다대포 서남쪽 해발 78m의 나지막한 산 일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낙동강 하구가 바다와 어우러지고 태백산맥의 마지막 끝자리가 되는 몰운대는 경관이 아주 뛰어나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부산 영도 태종대(釜山影島太宗臺)[명승 제17호], 해운대와 함께 부산의 3대(臺)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의 사적을 새긴 정운공 순의비와 다대포 객사가 몰운대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이곳은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는데, 낙동강에서 밀려온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측된다.
몰운대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전사한 정운의 이름 ‘운(運)’과 연관 지어 해석한 경우도 있으나, 임진왜란 이전인 1544년(중종 39)에 ‘몰운대’라는 이름이 확인되고 있어 사실과는 다르다. 해류의 영향으로 낙동강 하구에 짙은 안개와 구름이 끼어 시야가 자주 가려지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