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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09
한자 社會主義運動
영어의미역 Socialis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철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위하여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초기 사회주의 운동]

1919년 3·1 운동 후 봇물 터지듯 결성되었던 각 지역의 청년회는 1922년경 대개 침체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때 민족 운동의 새로운 방도로서 사회주의 이념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사회주의 이념은 운동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나 특히 청년 운동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20년 서울에서 결성된 전국적 청년운동단체인 조선청년회연합회 내에서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대립·분화가 생겨났다. 그 결과 1923년 3월 사회주의 운동 노선에 입각한 청년 단체들이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전 조선 청년 당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청년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부산의 경우 3·1 운동 직후 각양각색의 청년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결성되었다. 부산청년회부산진, 고관(古館), 초량, 영주동, 영도, 부민동, 아미동 등지에 있었던 친목회 성격의 7개의 부산 지역 청년 단체들이 연합하여 1920년 11월 말 결성되었다. 그러나 지주·상업 자본을 중심으로 한 민족 자본가 상층의 문화 운동이 침체되고, 1921년 부산 부두 총파업 등에 적극 관여하였던 활동가들[김철수(金喆壽)·김종범(金鍾範)·조동혁·최태열 등]이 부산 지역을 이탈하면서, 1922년 후반기부터 부산청년회 활동은 거의 휴면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1924년 들어 초랭객주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자본 하층 계층이 부산청년회에 대거 진출하면서, ‘조선인 도항 저지 철폐 운동’[1924], ‘보천교 박멸 운동’[1925] 등으로 사회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부산노동공제회와 상애회, 그리고 보천교 등 일제의 관변 단체나 친일 단체를 상대로 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보천교 박멸 운동’은 일제가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을 막고자 친일 단체[각파유지연맹·보천교]들을 이용해 강연회 습격 등으로 부산청년회의 활동을 방해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그동안 휴면 상태에 있던 부산청년회가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통해 투쟁성을 한 차원 높인 것은 물론,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에게 위험 요소로 감지될 정도로 상승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전국적 수준에서의 청년 단체의 성격 전환은 이미 1923년 전 조선 청년 당 대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청년 운동의 주도적 흐름이 소장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는 무산 계급 옹호 방향으로 바뀌자 초기 민족부르주아지 중심의 문화운동은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의 경우는 소장 청년층 중심의 운동 세력이 곧 바로 대두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1924년 하반기까지는 민족 자본가 중심의 청년 운동이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는 앞서 밝혔듯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의 맥이 이어지지 못한데서 기인한 바가 컸다.

[1925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본격화]

1925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과 함께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에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어, 이들 단체의 청년 운동 방침이 관철되면서 부산 지역을 비롯한 전국의 청년 운동에 변화가 생겨났다. 1925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부산 지역은 사회주의운동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은 평탄하지 못하여, 김용진과 고정대를 중심으로 기존에 부산청년회에서 터를 잡았던 사회주의 세력과 김해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8월을 기점으로 부산 지역 사회 운동에 진출한 노상건 그룹이 각자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불협화음을 낳게 된 것이다.

청년 운동의 통일 방침에 따라 수정청년회와 부산진청년회를 기반으로 한 노상건 그룹의 ‘부산청년연맹’과 김용진·고정대·황기수를 중심으로 한 부산청년회·초량청년회·영주구락부·서부청년회·남부청년회·부산형평청년회 등의 ‘부산부청년연맹’이 1925년 11월~1926년 1월에 걸쳐 각각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 지역에서는 사상 단체 ‘제4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김용진·고정대를 중심으로 한 사상 단체 제4계급에는 민족 자본가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참여한 반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인 노상건 그룹 인물들은 배제되어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분명 부산 지역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제4계급에서 활동하였던 청년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윤택근·강대홍(姜大洪)·노백용(盧百容)·김계영 등으로, 이들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이후 신간회 부산지회, 부산청년동맹 등의 사회 운동 단체는 물론, 1930년 조선방직 총파업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신간회 부산지회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이상과 같이 1925년경 사회주의 세력은 양적인 면에서 청년 단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청년연맹 결성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사회주의자들의 장기적인 분열은 사회 운동 자체의 역량 소모를 가져왔고, 이는 신간회 부산지회가 출범할 무렵 민족주의 좌파가 집행부를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1926년 6·10 만세 운동을 기화로 제2차 조선공산당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운동 노선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27년 말에 이르면 사회주의자들이 부산청년동맹의 결성을 통해 어느 정도 대열을 정비하면서 신간회 부산지회 집행부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는 신간회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라는 전국적 현상이 1927년 연말을 기점으로 부산지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음을 뜻한다. 하지만 2, 3개월이 채 못가 그들은 지회의 간부직에서 재차 물러나게 되는데, 이는 1928년 2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3차 조선공산당 검거 열풍에 강대홍이 체포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후 사회주의 계열은 1929년 들어 노상건, 안상교(安常敎), 김칠성(金七星)을 중심으로 재차 부산지회 집행부에 나아간다. 그해 12월 8일 개최된 제4회 정기 대회가 그 정점이었다. 그러나 이날 선출된 새 집행부의 면면을 보면, 1920년대 중반부터 줄곧 활동했던 노상건, 안상교, 김칠성 등의 중진 사회주의자들은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회주의자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즉, 부산노우회[이강희(李康熙)·김시엽(金時燁)·황명석(黃命碩)·이순경], 부산합동노동조합[황명석], 부산출판노동조합[이화우·이순경·황명석], 부산고무직공조합[김성태] 등에서 활동하는 신진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포진하였다.

이들 신진 사회주의자들의 부산지회 장악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 신간회 해소론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제기할 정도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1930년 직전까지 부산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은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 노상건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에 따라 이 모든 사회주의 운동은 지하 운동으로 바뀌고 말았고, 그 상태로 해방 직전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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