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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24
한자 倭館開市
영어의미역 Market Opening in Waegwan
이칭/별칭 사무역(私貿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성일

[정의]

정부로부터 특별히 허가를 받은 상인들이 왜관으로 들어가 대마도에서 파견되어 온 대관들과 거래하는 교환 행위.

[대일 외교와 무역에서 차지하는 개시(開市)의 위치]

조선 시대에 외교 업무를 관장하였던 예조(禮曹) 전객사(典客司)에서 편찬한 『변례 집요(邊例集要)』를 보면, 개시가 대일 외교와 무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즉 이 자료집의 제8권 공무역(公貿易)·하납제절(下納諸節)에 이어서, 제9권에 개시·조시(朝市)에 관한 설명이 있다. 또 제10권에는 지급(支給)·증급(贈給)·휼전(恤典)·시탄(柴炭)·예물(禮物)·사증한진가료(私贈限盡加料)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정리한다면, 제8권에서는 공무역을, 제9권에서는 개시를, 그리고 제10권에서는 잡물 지급(雜物支給)에 관한 것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무역은 조선 측 거래 당사자가 조선 정부인 데 반해서, 개시는 조선 측 거래 당사자가 민간 상인이라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다. 또 조선 정부가 부산의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 사신들에게 경제적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각종 잡물 지급과 달리, 개시는 두 나라가 경제적 반대급부를 전제로 하는 상품 교환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개시일]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무역을 재개하면서 한 달에 몇 번 장을 열 것인지를 놓고 조선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3일마다 한 차례씩, 즉 한 달에 10회 개시를 건의하였다. 장을 여는 날이 드물어 왜인들이 오래 체류하게 되고, 그러는 사이에 밀무역을 하는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 비변사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래 부사 조존성(趙存性)은 임진왜란 이전의 월 3회에 비하여 월 10회는 너무 많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0월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개시 횟수가 월 6회로 정해졌다. 즉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을 개시일로 정한 것이다. 한 달에 여섯 차례 열린다 하여 이 개시를 육개시(六開市), 육차 개시(六次開市), 육대 개시(六大開市)라고도 불렀다. 또 개시 대청(開市大廳)에서 열린다 하여 이를 대청 개시(大廳開市)라고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3일과 8일이 든 지정된 개시일에 5일마다 열리는 것을 대개시(大開市), 본개시(本開市)라 하여, 한 때 매월 5일에 열리던 이른바 오일 개시(五日開市)와 서로 구분하였다.

한편 개시일에 사정이 생겨서 장이 열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는 두 나라가 서로 협의하여 다른 날을 잡아서 개시하였는데, 이것을 가리켜 별개시(別開市) 또는 별시(別市)라고 불렀다. 어떤 기록에는 ‘대신 여는 장’이라는 뜻으로 대시(代市)라고 적혀 있기도 하였다.

[개시에 참여하는 상인]

개시에 참여하는 조선 상인들은 사전에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은 공상(公商)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서, 비변사는 경외(京外)의 상인들에 대해서 반드시 호조의 행장(行狀)이나 각 도(道) 감사(監司)의 행장을 미리 받도록 조치하였다. 또 개시에 참여하는 상인들은 동래부(東萊府)가 발급하는 패(牌)를 받아야 했는데, 패를 받은 상인이라는 뜻에서 개시에 참여하는 상인들을 가리켜 수패 상고(受牌商賈)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래부의 왜관 무역에 참여하는 상인들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동래 상고(東萊商賈)라고도 불렀으며, 이것을 줄여서 내상(萊商)이라고도 하였다.

한양의 강상(江商)[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의 송상(松商), 의주의 만상(灣商), 평양의 유상(柳商)과 함께, 동래의 내상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私商)이자 거상(巨商)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왜관에 출입하는 조선 상인의 숫자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한 제한이 없었다. 그런데 거래가 잦아지면서 폐단이 생기자 조선 정부는 왜관의 개시에 참여하는 무역 상인들의 인원을 정하여 제한하기도 하고, 인원 제한을 폐지하기도 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70~80명에서 20명으로 줄였다가[1678년(숙종 4)], 아예 인원 제한을 폐지하여 누구나 왜관 개시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적도 있었다[1680년(숙종 6)]. 왜관 개시가 난잡해지자 다시 정원을 30명으로 정하였다가[1691년(숙종 17)], 상고 정액제를 폐지하기도 하는 등[1708년(숙종 34)] 많은 변화를 보였다.

[소상인의 개시 참여]

월 6회 열리는 개시에 참여한 상인들 중에는 경영 규모가 큰 상인들, 즉 대상(大商)이나 도중(都中)보다는 규모가 작은 소상인(小商人) 즉 잡상인(雜商人)으로 불리는 상인들도 있었다. 1741년(영조 17) 대마도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개시에 참여하는 2 상인들 중에는 잡동사니 물건이나 소량의 쌀을 매매하는 소상인들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또 『변례 집요』 권9 개시 조(開市條)를 보면, 1749년(영조 25) 4월 동래 부사 정권(鄭權)이 개시 감관(開市監官)의 수를 늘려 줄 것을 중앙 정부에 요청하고 있는데, 이것은 개시 때 잡상 즉 소상인들이 왜관의 각 방에 흩어져 들어가 밀무역을 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통해서 왜관 개시에 참여하는 소상인의 활동을 살필 수 있다.

[물화의 검사와 수세]

동래부가 발급하는 패를 소지하고 있다 하여 함부로 왜관을 드나들 수는 없었다. 개시일에는 반드시 왜관의 수문(守門) 앞에서 역관(譯官)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그리고 세금을 거두고 개시를 감독할 수세관(收稅官)과 개시 감관이 상인들의 물품을 검사하여 장부에 기록하였다. 이것은 중국 조정에서 사용을 금지한 용이 그려진 망룡단(蟒龍緞) 같은 거래 금지 품목을 가려낼 뿐만 아니라, 왜관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물품과 왜관에서 가지고 나오는 물품을 조사하여,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연말이면 왜관에서 거래된 물품의 내역을 중앙 정부에 보고하였다.

1610년(광해군 2) 9월 비변사는 조선 상인들이 왜관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물건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먼저 매매를 하게 한 다음 조선 상인들이 상거래를 통해 얻은 은자(銀子) 등 물건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 동래 부사가 기록한 것을 책으로 만들어서 월말마다 한 건은 호조(戶曹)에 보고하고, 한 건은 비변사로 올려 보내도록 할 것을 비변사가 건의한 적이 있었다.

한편 왜관 개시에 부과하여 징수하던 수세권은 처음에는 호조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1763년(영조 39) 동래 부사 송문재(宋文載) 때부터는 동래부로 이관되었다. 즉 왜관 개시에 참여하는 조선 상인들의 무역품에 부과하던 무역세(貿易稅)가 처음에는 국세(國稅) 형태로 징수되다가, 나중에는 지방세 형태로 바뀐 셈이다. 동래부에서는 개시에서 거둔 세금을 재원으로 하여 연례송사(年例送使)나 차왜(差倭) 등 일본에서 온 사신에 대한 외교 비용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개시 감독관]

개시일에 조선 측에서 파견하는 관리로는 훈도와 별차를 비롯하여, 3가 파견한 수세관, 동래 부사가 거느리는 개시 감관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개시 때 잡상인 즉 소상인의 출입을 관장하는 간검 통사(看檢通事)가 있었다. 한편 일본 측에서도 무역 업무를 담당하는 대관을 비롯하여,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역관과 질서 유지를 맡은 메쓰케[目付]와 요코메[橫目] 등이 개시를 참관하며 감독하였다.

[개시 의례]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의례(儀禮)가 거행된다. 훈도와 별차가 개시 대청에 나아가면 상인들이 무릎을 꿇고 서로 인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 측에서는 대관의 우두머리인 일대관(一代官)[이치다이칸]과 이대관(二代官)[니다이칸], 정대관(町代官)[마치다이칸] 등이 훈도와 별차를 응대하였다. 이때 일본 측으로부터 술과 담배, 그 밖에 간단한 식사 등 요리가 제공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본 측이 내놓은 요리는 계절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또 훈도·별차와 상인들뿐만 아니라, 수문을 지키는 군관(軍官)이라든가 개시 감관 등에게도 도시락과 차(茶), 술 등이 제공되었다.

[개시 장소]

개시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개시 대청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개시가 대청 즉 큰 마루에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시 대청은 왜관의 동쪽에 있었던 3개의 대청 가운데 하나였다. 또 상인들이 교역할 물건을 길게 늘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시 대청이라고 불린 큰 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물건을 펼쳐 놓고 두 나라가 거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비가 내린다든지 하여 개시가 중지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개시 장소가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건물 내부나 밀폐된 공간이라기보다는 비교적 넓은 확 트인 마당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상인들이 흥정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서 각 방(房)으로 흩어져 들어가 몰래 밀무역을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1653년(효종 4) 3월 종전의 약조대로 개시 대청 외에 각 방에서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만일 그런 행위가 적발되면 밀무역으로 간주하여 처벌하기로 하는 등 통제를 강화한 적이 있었다.

[물품 대조와 가격 결정]

왜관의 개시 대청에서 개시를 하는데, 훈도·별차와 호조의 수세 산원(收稅算員), 동래부의 개시 감관 등이 일본 측의 대관과 동서로 벌여 앉은 다음, 물화를 뜰 가운데 나누어 놓고 서로 무역할 물품을 각기 전체 목록을 작성하여 점검하는 자료로 삼았다는 기록이 『춘관지(春官志)』에 보인다. 또 일본 측의 『매일기(每日記)』를 보면, 개시가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 적도 있었는데, 이것을 보면 교역품의 수량과 품질 확인에 이어서 가격을 흥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잠상에 대한 단속]

조선과 일본[대마도] 모두 왜관 개시에서 밀무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엄격히 다스렸다. 여기에는 두 나라 사람들이 몰래 금수품(禁輸品)을 거래하는 것을 막고, 기밀 누설과 풍기 문란 등을 미리 방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지만, 탈세(脫稅)를 못하게 하려는 의미도 담겨져 있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652년(효종 3) 6월 13일조를 보면, 5개 항으로 이루어진 왜관 개시 사목(倭館開市事目)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향통사(鄕通事)와 잠상인(潛商人)이 왜인과 밤에 만나 은밀히 들어가 매매한 자는 잠매금물조(潛賣禁物條)에 따라서 논죄하였다. 즉 죄가 가벼운 사람에게는 장(杖) 100에 도(徒)가 3년이요, 죄가 무거운 사람은 교수(絞首)한다고 되어 있었다. 동래 부사와 왜관 수문을 지키는 군관, 개시를 감독하는 군관 등도 이 율(律)에 따라 단죄(斷罪)하였으며, 잠상인 등은 본률(本律)에 따라 시행하였다.

이처럼 엄격한 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잠상 즉 밀무역을 단속해야 할 훈도와 별차 등 역관과 그 밖의 일부 조선 관리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오히려 잠상을 조장하는 일도 있었다. 국가에 걱정을 끼치는 이러한 일은 모두 역관배(譯官輩)들이 중간에서 도리나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부정한 이익만 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비변사에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대마도에서도 밀무역 가담자를 엄벌하였는데, 일본 측 밀무역 가담자에 대한 처벌은 『조선방과인장(朝鮮方科人帳)』에 구체적인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개시와 관련된 것들]

개시와 비슷한 것으로 조시(朝市)가 있었다. 조시란 글자 그대로 아침에 열리는 장을 말한다.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날마다 생선이나 채소를 구입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가 아침 장 즉 조시를 허용한 것이다. 조시에 참여한 조선인의 숫자는 적을 때는 20~30명, 많을 때는 50~60명에 이르렀다. 또 개시와 유사한 것으로 오일 개시(五日開市)가 있었다. 오일 개시란 매월 5일에 열리는 시장을 말한다. 식량으로 쓸 쌀이 부족한 왜관의 일본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조선 정부가 특별히 허가한 것이 오일 개시이다. 1665년(현종 6) 5월 조선 정부는 관(官)에 신고하고 세금을 납부한 사람에게는 소량의 쌀을 왜관에 가지고 가서 팔 수 있게 허용하였다.

동래부는 조시와 오일 개시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여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쉽게 혁파(革罷)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쌀 거래를 둘러싼 폐단을 우려하여 1708년(숙종 34)에 오일 개시를 혁파하였으며, 조시에서는 쌀을 제외한 어물과 채소만 거래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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