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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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武器 |
영어의미역 | Weapon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상율 |
[정의]
부산 일대의 삼국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
[개설]
삼국 시대는 이전의 삼한 시대 이래 수평적인 사회 구조를 지속하던 각 지역 집단이 주변의 지역 사회를 통합하거나 집단 간의 연합을 이루면서 계급적 지배 질서를 바탕으로 한 수직적인 사회로 재편성되어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춘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에 편승하여 삼국 시대에는 앞 시기에 볼 수 없던 여러 문물이 등장하였는데, 고대 국가의 특징인 정복 사업을 수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도구인 무기도 다양하게 분화,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 무기의 종류]
부산 지역의 거칠산국(居柒山國)의 중심 고분군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철제 무기가 발굴되었다. 이들 무기는 그 기능에 따라 크게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공격용 무기는 다시 원거리 무기[활·화살·석궁·투창 등]와 근거리 무기[칼·검·모·창·낫·도끼 등]로 구분되며, 방어용 무기는 자신을 공격용 무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갑옷·투구·방패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기병이 타는 말에도 방어가 필요하므로 말 투구, 말 갑옷 등을 장착하였다. 이러한 무기 중 일부는 이미 삼국 시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삼국 시대가 되면 재질 및 형태, 수량은 물론 그 성격까지 획기적으로 변모하였다. 이 시기의 것으로 다수 출토되는 무기로 한정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공격용 무기
1) 화살촉
화살촉은 삼한 시대에 슴베[칼, 괭이, 호미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가 없는 무경(無莖)의 삼각형식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점차 길이가 짧아지면서 퇴화하고, 삼국 시대에는 슴베가 있는 유경식(有莖式)이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 형식은 무경식에 비해 선단부가 예리하여 관통력이 뛰어났다. 또한 종류도 유엽(柳葉)형, 삼각형, 추(錐)형, 착두(鑿頭)형, 골촉(骨鏃)형, 능(菱)형 등 다종다양한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특히 유엽형, 삼각형, 골촉형의 등에는 역자식(逆刺式)[ 끝이 굽은 가시]도 등장하게 된다.
2) 모
모(矛)는 마름모꼴로 생긴 창으로 삼국 시대 무기 중 가장 중요한 개인 병기였다. 삼한 시대 이래 이단병식(二段柄式)에서 점차 일단병식(一段柄式)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봉부(鋒部)의 폭이 좁아지면서 선단(先端)부가 예리해지고 전체적으로는 길이가 길어지는 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모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도검(刀劍)의 장대화가 더욱 두드러지는데, 특히 장대화한 고리자루칼[환두대도(環頭大刀)]의 등장은 이후 삼국 시대 칼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삼국 시대에 널리 유행한 칼 중에 손잡이 끝의 고리 속에 여러 장식을 넣은 장식용 대도(裝飾用大刀)의 출발도 고리 자루 칼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창
창(槍)은 긴 자루에 꼽아 적을 찌르는 무기로서 모(矛)와 비슷하나 창을 자루에 끼우는 장착(裝着)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모의 경우 소켓상의 자루 삽입부가 있어 여기에 자루를 끼워 고정시키는 반면, 창은 신부(身部)로부터 이어지는 경부를 자루에 직접 박아서 고정했다. 삼국 시대 무기로서는 모에 비해 출토 예가 매우 적으며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주로 나타났다.
4) 낫
낫[철겸(鐵鎌)]은 전통적으로 농구에 속하는 것이나 최근에는 자루 끝에 무기에 사용하는 물미[깃대나 창대의 끝에 끼우는 뾰족한 쇠]를 장착한 예가 확인되어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유사시에 적 기병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말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며, 이때 걸어 당기는 무기로 적절히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 낫과 유사한 형태를 띠는 무기 중 곡도(曲刀)가 있는데, 낫이 자루와 직각인 반면 곡도는 일직선상으로 장착하는 차이가 있다. 또한 낫과는 달리 날이 굽어진 신부의 바깥쪽으로 나 있다.
5) 도끼
도끼도 선사 시대 이래 여러 용도로 사용하던 공구이나 고구려 벽화 고분에 묘사된 것처럼 보병이 치고 찍는 대표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삼국 시대에 공격용 무기가 급증한 만큼 방어용 무기도 이 시기부터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공격용 무기의 변화와 발달이 그만큼 방어용 무기의 발달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2. 방어용 무기
방어용 무기를 대표하는 갑옷과 투구, 즉 갑주(甲冑)는 투구의 경우 종장판혁 철주(縱長板革綴冑), 갑옷은 대부분 종장판 판갑(縱長板板甲)과 괘갑(挂甲)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종장판혁 철주와 괘갑은 한 벌로서 당시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하던 기승용 갑주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부산·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에서는 종장판혁 철주가 괘갑보다는 종장판 판갑과 한 벌을 이루거나 혹은 단독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고, 괘갑과 종장판혁 철주가 한 벌로 출토된 예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 2호분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괘갑만 매납된 예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3호분·23호분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이처럼 괘갑의 수량이 극히 적은 것은 괘갑의 제작이 종장판 판갑에 비해 어려운 만큼, 그 소유가 한정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괘갑이 출토된 무덤들이 모두 해당 지역의 수장급에 상당하는 대형 무덤이라는 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이 점에서 삼국 시대에 갑주의 매납은 그 사용 유무를 떠나 권력의 상징물로도 애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승용 갑주의 상징인 종장판혁 철주는 출현기인 4세기에는 낙동강 하류역에 한정 분포하나, 5세기 이후 6세기 전반까지 점차 확산되어 삼국 시대 투구의 주류를 이룰 정도로 크게 유행하였다. 형태상 주체가 ‘S’ 자형으로 다소 휘어진 것과 밋밋한 것 2종으로 구분되는데, 특히 전자의 만곡종장판혁 철주(彎曲縱長板革綴冑)가 수장급을 비롯하여 이 시기 투구의 주류를 이룬다. 특히 4세기 대의 대형 무덤에서 괘갑 혹은 종장판 판갑과 함께 출토되거나 단독으로 출토되는 투구는 거의 만곡종장판혁 철주이다.
갑옷 중 가장 출토 양이 많은 종장판 판갑은 현재까지 중국 둥베이 지방은 물론 고구려에서도 실물 자료가 없고 낙동강 하류역과 경주 권역에서만 한정하여 출토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영남 지방 특유의 갑옷이라 단정할 만하다. 이러한 철제 판갑의 등장은 앞 시기의 토착계 목갑 혹은 피갑 등의 유기질제 갑옷이 삼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역동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철제로 전환된 데 따른 것이다. 종장판판갑은 등장 초기부터 기본적으로 종장철판에 의해서 구성된 점에서 영남 특유의 정형화한 판갑이라 할 수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제작상의 차이를 보인다.
특히 종장철판의 결합 방법에 따라 못으로 박은 정결 판갑(釘結板甲)과 가죽끈으로 이은 혁철 판갑(革綴板甲)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고식(古式)에 속하는 울산 중산동 고분군 75호분 판갑이 정결로 제작된 점에서 출현 초기에는 정결 기법이 채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어서 혁철 기법도 나타나기 때문에 두 기법은 거의 동시기에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판갑의 규격이나 사용 철판의 매수, 형태 등에서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궁극적으로 이러한 다양화는 곧 종장판 판갑이 출현 초기부터 빠르게 토착화하여 정착하였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제한된 괘갑에 비해 기존의 발달된 단조 기술을 바탕으로 대량 생산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낙동강 하류역에서는 이 판갑이 기승용의 상징인 종장판혁 철주와 한 벌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점에서 기승용으로는 괘갑뿐만 아니라 종장판 판갑도 기승 전투 때에 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삼국 시대의 판갑은 사용한 철판의 형태에 따라 삼각 판갑, 횡장 판갑, 장방 판갑 등 다른 유형의 것도 존재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특히 4세기 후엽에 속하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64호분 출토의 방형판혁철 판갑(方形板革綴板甲)은 종장판 판갑과 종장판혁 철주, 괘갑으로 구성된 이 지역 판갑의 특징을 벗어나는 이례적인 것으로서 현재까지 그 계보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 이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 시대에는 기승 전투가 행해진 만큼 기병이 타는 말에도 방어에 필요한 말 투구[마주(馬冑)]와 말 갑옷[마갑(馬甲)] 등을 장착하였다. 이 가운데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는 말 투구는 동아시아 중에서 특히 가야에 실물 자료가 집중되어 있어 가야의 기승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제작 방식에 따라 ①얼굴 덮개부를 비롯하여 중요 부위를 기본적으로 분할하는 방식으로 제작한 것과 이와는 달리 ②각 부위를 한 판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①이 중국 둥베이 지방의 말 투구 및 가야 지역과 깊은 연관을 가지는 반면, ②는 고구려에 그 계보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