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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42
한자 金璋泰
영어음역 Gim Jangtae
이칭/별칭 중강장태(竹岡璋泰)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682-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상공회의소 부회두
출생 시기/일시 1886년 2월 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9년 -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13년 5월 19일 -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유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경남은행 마산, 구포, 하동지점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부산상공회의소 부회두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부산상공협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조선메리야스[합명]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부산양조소[합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경상남도 의회 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부산부회 의원에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56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학교|수학지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 - 일본 도쿄[東京]
활동지 부산공립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 226번길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상공협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조선메리야스[합명]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682-3[구 부산부 좌천정 682]
활동지 부산양조소[합자]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682-3[구 부산부 좌천정 682-3]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상공회의소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8지도보기
활동지 부산부회 - 부산광역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친일 자본가.

[활동 사항]

김장태(金璋泰)는 1886년 2월 6일 부산부 좌이면 만덕동 1통 2호[현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서 태어났다. 1909년 일본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를 수료한 뒤, 부산공립보통학교 훈도를 맡아 교직에 종사하였다. 1910년 일본 삼중현(三重縣) 사일시상업학교(四日市商業學校) 교원으로 있다가, 1913년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유로 약 5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그 후 조선총독부 지방 법원 통역생 겸 서기로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구포지점장, 하동지점장을 지내고, 1927년 경남은행 본점 감사를 맡았다.

1928년 부산의 유동준, 이병희와 함께 회원 33명의 부산상공협회를 조직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장태는 개인 사업으로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와 부산양조소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운영한 회사의 자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이를 발판으로 부산 경제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8년부터 1942년까지 부산상공회의소 부회두를 계속해서 역임하였는데,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부회두는 2명으로 일본인 1명, 조선인 1명이 맡게 되어 있었다. 김장태는 주요 경제인 단체의 부회두를 장기간 독점하고, ‘중강장태(竹岡璋泰)’로 창씨 개명하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친일 자본가로서의 행보를 확실히 하였다.

경제 분야에서 활동한 이력을 배경으로 김장태부산부회 의원과 경상남도 의회 의원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친일 중진 인사로 거듭났다. 특히 1933년 5월 10일 경상남도 의회 의원 선거에서 조선인 부산부회 의원들이 단결하면 한 명의 조선인 민선 도회 의원을 탄생시킬 수 있었으나, 김장태의 배신으로 실패한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은 김장태의 이런 정치적 행보를 친일적이라 비판하였다.

김장태의 친일 활동은 지역 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1941년 10월에는 윤치호(尹致昊)·최린(崔麟) 등이 조직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으로 참가하여, 조선 신궁을 참배하고 진충 봉공을 선언하는 데 동참하였다. 이러한 친일 행각은 해방 직전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그 후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56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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