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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961
한자 李圭直
영어음역 Yi Gyujik
이칭/별칭 이규명(李圭明)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사회 활동가|정치인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경력 구포은행[경남은행] 두취
출생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78년 2월 - 사숙에서 한문 공부
활동 시기/일시 1898년 - 명례궁 감관으로 김해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99년 12월 14일 -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5년 2월 - 경상북도 사검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관직 사직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사립명진학교 발기인 및 후원인으로 활동, 무역업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경상남도 창원군 대산면 황무지 개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구포은행[경남은행] 두취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16년 5월 25일 - 경남인쇄주식회사 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구포은행[경남은행] 취체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5월 25일 - 부산증권주식회사 취체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육영의숙 신설, 부산공립보통학교 부형회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4월 -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의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45년 - 구포은행[경남은행] 취체역에 임명
출생지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활동지 경남은행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구 부산부 초량동 604]
활동지 부산증권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구 부산부 대청정 1정목 35]
활동지 경남인쇄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구 부산부 영주동 260]
활동지 부산공립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1동 영주동 580
활동지 부산상업회의소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구 부산부 서정 1정목 8]지도보기

[정의]

근대 부산 출신의 경제인이자 사회 활동가, 정치인.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이건영(李建榮)이며, 동생은 1915년 부산조선인상업회의소 회장을 역임하였던 이규정(李圭正)이다

[활동 사항]

이규직(李圭直)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1878년 2월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 1898년 명례궁(明禮宮)의 감관(監官)으로 김해에 부임하여 김해와 양산군 내의 호전(芦田) 감리 등에 종사하다가, 1899년 12월 14일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 면직되었다. 1905년 2월 경상북도 사검관으로 내장원 소관 역둔토를 관리하였다. 1907년 관료를 사직하고 실업계에 투신하였다.

1908년 이후 부산에 거처를 마련하고 미곡 무역상을 하면서 부산, 동래, 김해 지방의 공직을 맡았다. 이 무렵 일본인 상인들의 상권 장악력이 강화되자 부산의 조선인 객주 가운데 오흥규, 김성우(金聖佑), 이영균 등과 공동 출자하여 자본금 2만 4000원으로 초량에서 공동 객주 영업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개항기의 경제 활동으로 자본을 축적한 이규직은 1910년 경상남도 창원군 대산면 부근의 황무지 개간에 투자하고, 1920년 대산수리조합을 설립해 조합장을 맡았다. 금융업에도 관심이 많아, 1909년에는 부산의 정기두(鄭箕斗), 김경백과 경상남도 양산의 엄신영 등과 함께 은행 설립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고, 같은 해 설립된 구포저축주식회사[5주]에 소액 주주로 참여하였다. 그 후 구포저축주식회사가 1912년 구포은행으로 전환하면서 자본금을 늘릴 때 투자하여 451주로 최대 주주가 되었다. 또 구포은행[경남은행]의 두취[1912~1919년], 취체역[1919~1921년, 1924~1925년], 감사 등을 맡았다. 1912년 무렵에는 초량일기계 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외에 문상우(文尙宇)가 대표를 맡고 있는 부산증권주식회사[1920년 5월 25일~1927년, 1928년]의 이사와 조선인의 대표적인 인쇄 업체인 경남인쇄주식회사[1916~1927, 1928년]의 감사를 맡아 부산의 조선인 경제계에서 일정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의원[1922년 4월~1926년 3월]을 지내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규직은 개항기부터 교육 운동과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정자범(鄭子範), 현경진, 고윤하, 조용우, 박승옥 등과 함께 사립명진학교의 발기인 및 후원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어대성(魚大成) 등과 함께 부산영주동청년친목계를 조직하여 영주동육영의숙을 신설하고 보통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아동의 교육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부산공립보통학교부형회를 조직하여 학교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9년 3·1 운동 후 부산 지역 부르주아 층이 조직한 문화 운동 단체였던 부산예월회[1919년 12월]에도 참가하였다.

[상훈과 추모]

1935년에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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