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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718
한자 鄭箕斗
영어음역 Jeong Gidu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448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사회 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부산부협의회 의원
출생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탁지부 세무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부산예월회 회원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부산부협의회 의원, 부산학교비 평의원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부산미곡거래소 회원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448
활동지 부산광역시

[정의]

근대 부산 출신의 경제인이자 사회 운동가.

[활동 사항]

정기두(鄭箕斗)는 1869년 3월 15일 부산진 초량[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설 한문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889년부터는 조선물산이란 무역상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1906년에 잠시 탁지부 세무관에 임명되어 함경남도에서 근무하였다가 1907년에 사임하였다. 이후 초량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였으며, 땔나무 도소매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정기두는 부산의 객주들과 함께 노동자와 주간에 영업하는 이를 모아 초량동립학교(草梁洞立學校) 내에 야학을 설치하고 유지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1909년에는 여자 교육 기관인 양정숙(養貞塾) 설립에도 앞장서는 한편 자신의 별장을 교사로 제공하였다. 또한 1909년 영남 지역 지주들이 은행을 설립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여기에 이규직(李圭直) 등 부산의 객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3·1 운동 이후 정기두는 부산 지역 조선인 자본가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한 부산예월회(釜山例月會)에도 가입하였다. 부산예월회는 조선인 상공업의 발달과 교육 개선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의 추진 기구로 조직되었기에 주로 조선인 자본가 층의 견해와 요구 조건을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동래 지역 유지들과 함께 조선교육개선기성회를 조직하고, 조선총독부 조선교육조사위원회에 교육 개선 건의안을 제출하는 것 등이었다.

한편, 정기두는 실력 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 운동에도 가담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일제에 타협하는 행보도 걷기 시작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 정치와 조선인 자본가 포섭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며 일부 조선인 자본가 층의 부협의회, 학교 평의회, 기타 관변 단체로의 진입을 허용하였다. 정기두는 이에 따라 1920년 11월 부산부협의회 의원 선거에서 송태관 등 조선인 3명과 함께 당선되어 2년간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더불어 학교 평의원에도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1932년 창립된 부산미곡거래소의 유일한 조선인 회원이 되는 등 일제 당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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