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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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奉煥 |
영어음역 | Gim Bonghwan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나철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봉환(金奉煥)[1895~1928]은 1919년 당시의 나이가 25세였으므로 1895년 생으로 추정된다. 승려이며 불교 이외에 많은 독서를 하였고, 정치 철학 관련 신문 기사를 탐독하였다고 한다. 3·1 운동 당시 불교계의 민족 대표인 한용운(韓龍雲)이 범어사(梵魚寺)에 들러 범어사도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김봉환과 더불어 7인의 대표가 서울 의거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서울의 3·1 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와 부산에서도 범어사를 기점으로 동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봉환은 김영규(金永奎)·차상명(車相明)과 더불어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의 대표로 모임에 참가하였다. 17일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의 졸업생 송별연을 마치고, 학생 대표들은 만세 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범어사 동래포교당이 있는 복천동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밀고를 받은 일본 경찰에 의해 주모자 일부가 체포되자, 김봉환은 다른 학생들과 더불어 해산되었다.
그러나 다시 만세 시위를 계획한 이들은 18일 저녁 동래읍성 서문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해산한 후 19일 다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진 동래 장터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김봉환은 시위대를 지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범어사 3·1 운동 관련자 중에서 최고의 형을 선고 받았던 것이다. 출옥 후 만주로 갔는데 1928년 재만 독립 단체 간의 알력으로 동포의 손에 피살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