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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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甘同浦 |
영어의미역 | Gamdong-po |
이칭/별칭 | 구복포,구법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있던 조선 시대 낙동강의 포구.
[명칭 유래]
감동포(甘同浦)가 위치하였던 오늘날 구포(龜浦) 지역에서 조선 시대부터 마을의 안정과 풍요를 비는 별신굿을 지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민속 신앙의 유적으로 비석골에는 장승이 있었고 구포 장터의 나루 쪽으로 솟대[蘇塗]가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구포는 제사를 지내는 갯가, 굿을 하는 갯가로서 ‘굿개’이므로 신(神)의 의미를 내포한 ‘구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양산군지(梁山郡誌)』의 구포에 관한 기록을 보면 “감동포는 일명 구복포(龜伏浦)이다”라고 나와 있다. 감동포의 감동(甘同)이란 지명이 신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복포라는 지명도 구포 남쪽 거북산의 모습이 거북이 강을 향하여 엎드려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구포의 다양한 옛 지명인 감동포·구법포·구복포 등이 ‘두 물이 만나는 곳’, 또는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큰 나루’라는 뜻으로 지명 유래를 추정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감동포이던 오늘날 구포 나루터는 구포의 낙동강변에서 김해시 대동면 대동 수문으로 왕래하던 나룻배의 선창이었다. 감동포는 낙동강 하류의 요지라는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행정 구역이 빈번하게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줄곧 양산군에 속하였고, 1869년(고종 6) 경상남도 동래부(東萊府)에 속하다가 1875년(고종 12) 양산군에 환속되었다.
다시 국권 강탈을 전후하여 부산부 좌이면(左耳面)으로, 1914년에는 동래군 구포면(龜浦面)으로 정착하였다. 이 일대가 교통 요지인 만큼 조선 시대에 감동포 언덕 위에 곡물과 포목 등을 보관하는 감동창(甘同倉)을 비롯하여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동원진(東院津)에 수참(水站), 덕천동 구법진(仇法津)에 기찰(譏察)이 각각 설치되었다.
감동포는 조선 후기 상주의 낙동진 나루터, 합천 율지(栗旨)의 밤마리 나루터와 함께 낙동강 3대 나루터이었다. 강변 언덕 위에 국가 재정원인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감동창을 배경으로 강변에서부터 안쪽 넓은 공터에 들어선 감동장(甘同場)은 장타령이 나올 만큼 큰 장터이었다. 수륙(水陸) 운송의 중계지가 되어 정미업(精米業)이 번성하였고, 객주(客主)가 들끓으면서 감동장을 근거지로 삼은 포구 상업이 발달하였다.
이렇게 감동포의 감동장이 번창하여 일찍부터 상권(商圈)이 형성·발달하게 된 이유는 감동창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한제국 말에는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기 위한 쌀 선적장으로 이름났으나, 1933년 구포 다리[낙동장교]가 가설되면서 구포~김해 간의 수운 기능을 담당하던 이 나루터는 명성을 잃게 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 산천조에 “감동포는 동평현 서쪽 13리에 있다[甘東浦 在東平縣西十三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감동포는 구포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낙동강 하류 수운 네트워크의 현황을 비롯하여 낙동강 연안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