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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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生谷兄弟殉敎者墓 |
영어의미역 | Saenggok Brother Martyr’s Tomb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6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에 있는 병인박해 순교자 조석빈(曺錫賓)·조석증(曺錫曾) 형제의 묘.
[개설]
조석빈[1825~1868]과 조석증[1834~1868] 형제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감무공파 30세손이며 사우당(四友堂) 조이추(曺爾樞)의 6세손이다. 초기 천주교 신자인 이들은 심한 박해 속에 가재와 전답을 몰수당하고, 문중 선산이 있는 생활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의 배정문(裵禎紋)[정3품 통정대부, 수원가톨릭대학장 고 배문한(裵文漢)의 증조할아버지]의 동서학당에 은신하며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또한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 상자를 메고 양반 집안 등을 찾아다니며 천주학의 전교에 앞장섰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1868년(고종 5) 무진년에 두 형제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인근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김해 구산동 왜장대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형 조석빈은 두 팔을 옆으로 올려 십자로 서서 미소를 지으며 목이 잘렸고, 동생 조석증은 형의 목에서 솟아오른 피를 두 손에 받아 들고 “형님의 목에 십자가의 꽃이 피었다”고 외치며 자신도 따라가겠다면서 참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갈대에 싸여 온 형 조석빈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 조석증의 왜소한 알몸은 조씨 문중의 반대로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는데, 이를 배정문이 자신의 집 뒤 언덕 밭에 암장하였다.
[위치]
생곡 형제 순교자 묘(生谷兄弟殉敎者墓)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68번지에 있다.
[변천]
천주교 부산교구에서는 1989년 6월 19일~20일 이틀 동안 형제 묘를 발굴하였고, 출토된 유골은 부산대학교 치의학교실에 의뢰하여 감정하였다. 1995년 1월부터 대나무를 정리하고 진입로와 터 고르기 공사 및 잔디 심기 등을 끝낸 후, 5월 29일 지금의 묘지로 성분(成墳)하여 천주교 부산교구장의 집권으로 단정 미사를 올렸다.
[형태]
형제의 능묘를 조성하고 화강암 십자가를 세운 뒤 검은 돌 비석을 만들고 주위를 성역화하였다. 묘역과 휴식 공간을 포함하여 약 9,917㎡의 대지에 순교 공원을 조성하였다.
[금석문]
묘비에는 ‘순교자 조석빈지묘(殉敎者 曺錫賓之墓)[순교자 조석빈의 묘]’와 ‘순교자 조석증지묘(殉敎者 曺錫曾之墓)[순교자 조석증의 묘]’라고 적혀 있다.
[현황]
배문한 신부의 형인 배대한 박사가 순교자 묘지와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72번지 형제 순교자 기념관에 시신을 덮었던 개석과 고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극단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희생하며 종교적 신념을 지킨 조씨 형제의 사례를 통해 부산 지역 천주교 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