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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94
한자 曺錫曾
영어음역 Jo Seokjeung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6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순교자|종교인
성별
본관 창녕
출생 시기/일시 1834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0년경~1868년 - 천주학 연구 및 전교
몰년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9년 6월 -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묘지 발굴
추모 시기/일시 1995년 5월 29일 - 묘지 재단장 및 단장 미사 거행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시 삼방동
활동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묘소|단소 생곡 형제 순교자 묘 -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268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가계]

창녕 조씨(昌寧曺氏) 감무공파의 30세손이며, 사우당(四友堂) 조이추(曺爾樞)의 6세손으로, 아버지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순교 당시 함께 참수당한 조석빈(曺錫賓)이 형이다.

[활동 사항]

조석증(曺錫曾)[1834~1872]은 1834년 유서 깊은 창녕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천주교로 개종한 뒤에 심한 박해 속에 가재(家財)와 전답을 몰수당하고, 형 조석빈과 함께 문중 선산이 있는 생활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의 배정문(裵禎紋)[정삼품 통정대부, 수원가톨릭대학장 고 배문한(裵文漢)의 증조부]의 동서학당에 은신하면서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또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 상자를 메고 양반 집안 등을 찾아다니며 천주학의 전교에 앞장섰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에 조석증은 형과 함께 현재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인근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김해 왜장대에서 참수당하였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관헌은 먼저 형 조석빈을 참수하고 난 뒤 다시 동생 조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하였는데, 건장했던 형이 먼저 참수되어 쓰러지자 왜소한 동생 조석증이 형의 시신을 안고, “형님의 목에 십자가의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며 기뻐하면서 속히 참수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묘소]

참수 후 창녕 조씨 집안의 반대로 형제의 시신은 생곡동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는데, 이를 배정문이 자신의 집 뒤 언덕 밭에 암장하였다. 그 후 입으로만 전해지던 형제의 묘지를 순교한 지 120년만인 1989년 6월 19일~6월 20일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발굴하였으며, 1995년 5월 29일 생곡 형제 순교자 묘로 성분하여 부산 교구장의 집권으로 단장 미사를 올렸다. 이 묘지와 기념관을 포함한 순교자 묘역은 현재 고 배문한[배정문의 증손] 신부의 생가[강서구 생곡동 272번지]에서 그의 형인 배대한이 관리하고 있다. 형 조석빈은 자손이 없었고, 조석증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순교자로 예우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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